호랑이를 잡은 최루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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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최루백(崔婁伯 : ?~1205)
고려전기 기거사인, 한림학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호랑이를 죽이고 뼈와 살을 거두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安葬)한 다음,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시묘중인 어느 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나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情)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明月)과 청풍(淸風)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奉養)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孝)가 시종이 없다 이를 소냐.”라는 시를 읊고는 사라졌다고 한다.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승진하였다. 1153년(의종 7)에는 기거사인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였다. 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좌사간(左司諫) 박득령(朴得齡) 등과 함께 왕의 국정(國政) 자문에 응하였다.1158년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서 국자좨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諒)과 함께 승보시(升補試)를 맡아, 윤돈서(尹敦敍) 등 16명을 급제시켰으며,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루백(崔婁伯))]
관련 유적 및 유물
- 고문헌
- 최루백 유적 및 유물
- 관련 박물관 유물
효자 최루백 지식 관계망
이야기
최루백은 도끼를 들고 뛰기 시작했어요.
두 발은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처럼 빨랐고, 당근처럼 붉어진 얼굴에는 땀방울이 주르륵! 주르륵! 흘렀답니다.
그런데, 작은 입술이 계속 움직이면서 무슨 말을 하지 뭐에요? 귀를 대고 자세히 들었더니 이런 소리가 들렸어요.
“죽이겠소!! 아버지, 내 꼭 그 녀석을 죽이고야 말겠소!”
소년 최루백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참을 더 달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쉬지 않고 움직이던 그의 두 발이 멈췄어요!! 맞아요. 다섯 발자국 앞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배를 땅에 깔고 눈을 멀뚱거리며 최루백을 보고 있었지요.
“뭐야? 쪼그만 아이잖아? 그냥 가라, 배가 부르니 살려주마!”
호랑이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귀찮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어요.
하지만 15살 소년 최루백은 도끼를 높이 들고 이렇게 말했어요.
“네 이놈!! 내 아버지가 네놈 뱃속에 계시는데, 어찌 나 혼자 살려고 그냥 가겠느냐? 내가 반드시 너의 배를 갈라 아버지를 장사지낼 것이다!!”
호랑이는 갑작스러운 호통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어요. 그리고 아까 맛있게 먹은 남자가 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다른 호랑이와 싸우다가 돌아가실 때 무서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저를 찾아 왔네요.’
호랑이는 아버지 생각을 하며 최루백의 용기와 효심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어요.
“나는 살기 위해 아버지를 버렸는데, 너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버렸구나. 그래, 오늘 꼭 내 배를 갈라 아버지에게 효도하거라”
그렇게 말한 호랑이는 최루백의 도끼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눈을 감았답니다.
몇 년 후
... ...
경기도에 있는 어느 골목길에 사람들이 모여있었어요. 접시꽃이 달린 기다란 모자를 쓴 남자가 멋진 말을 타고 걷기 시작했죠.
그러자 구경꾼들은 오늘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목을 뺐어요.
“저기에요 저기! 호랑이 효자가 지나가요!” “어머나, 어쩜 저리 늠름할 수 있을까? 분명 하늘도 감동하신 게 분명해”
“맞아요. 맞아! 자기 아버지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먹더니 이제 장원까지 급제했으니 하늘이 낸 영웅이 분명합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어요. 그러자, 수염이 길게 난 이장님이 무리를 향해 말했어요.
“자! 여러분! 우리 모두 마을의 자랑 최루백을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네! 좋은 생각이에요”
사람들은 다 같이 손을 들고 이장님의 구령에 따라 외쳤어요.
“최루백 만세!! 호랑이를 잡은 효자 최루백 만세!!”
애니메이션
- 화성시 제공
가상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