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 이경석의 글쓰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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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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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2일 (토) 21:08 판

개요

  • 정의: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 생애 및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했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해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奉敎)·전적·예조좌랑·정언·교리 등을 두루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는 호당(湖堂)주 01)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또한 같은 해 말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면(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이 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해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 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1636년 병자호란 때 대사헌·부제학에 연달아 제수되어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며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이듬해 문관으로서는 최대의 영예인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 인사를 주관하였다.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주 02)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다.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영부조용(永不調用)주 03)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판서 및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이에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이어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53년(효종 4)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68년(현종 9)에는 신하로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평생 『소학』과 『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했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가 지은 온갖 서적을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주 04)해 광화현란(光華絢爛)주 05)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豔)주 06)하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 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 동안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가, 사후에 특히 「삼전도비문」으로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저서로는 『백헌집』 등 유집 50여 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左相李廷龜碑文)」·「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경석(李景奭))]

이야기

옛날 조선 시대 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어요.

임금님과 신하들은 맞서 싸웠지만 힘이 약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죠.

청나라는 조선보다 자신들이 뛰어나다는 내용의 비석을 만들라고 명령했어요.

임금님은 글을 쓰는 선비들에게 청나라를 높이는 글을 쓰라고 했어요.

하지만, 누가 그런 치욕적인 글을 쓰고 싶겠어요? 더군다나 조선 시대는 글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시대였어요.

당연히 아무도 비석에 들어갈 글을 안 쓰겠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석이 말했어요.

“제가 이 비문을 쓰면 사람들은 저를 비겁하다고 욕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걸 쓰지 않는다면 다시 청나라의 군대가 우리 백성을 괴롭힐 것입니다.

저는 차라리 이 나라를 위해 비겁하다는 욕을 듣겠습니다.”

이경석은 슬픈 마음으로 어렵게 어렵게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비석을 보고 이경석을 비겁하다고 욕했어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이경석은 이후로도 묵묵히 3명의 임금님을 섬기며 나라의 어려운 일들을 현명하게 해결해 나갔어요.

그런 이경석을 위해 임금님은 궤장이라는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했어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임금님은 말했어요.

“참된 용기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고통받는 백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버리는 것이다.

이경석은, 모두에게 욕을 먹을 것을 알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명예를 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용기다.”

이경석은 어려운 시기에 진짜 용기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어요.

지금도 이와 관련된 유물들을 경기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답니다.

가상현실


지식관계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