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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100840000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이경석선생묘 (李景奭先生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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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http://digerati.aks.ac.kr/DhLab/2021/101/HunHyeok/graph/lee.htm 네트워크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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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https://aharisu.tistory.com/26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의 기구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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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했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해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奉敎)·전적·예조좌랑·정언·교리 등을 두루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는 호당(湖堂)주 01)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또한 같은 해 말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면(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이 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해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 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1636년 병자호란 때 대사헌·부제학에 연달아 제수되어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며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이듬해 문관으로서는 최대의 영예인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 인사를 주관하였다.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주 02)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다.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영부조용(永不調用)주 03)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판서 및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이에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이어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53년(효종 4)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68년(현종 9)에는 신하로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평생 『소학』과 『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했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가 지은 온갖 서적을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주 04)해 광화현란(光華絢爛)주 05)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豔)주 06)하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 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 동안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가, 사후에 특히 「삼전도비문」으로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저서로는 『백헌집』 등 유집 50여 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左相李廷龜碑文)」·「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https://aharisu.tistory.com/entry/%EC%A1%B0%EC%84%A0%EC%9D%98-%EC%9D%B8%EC%A1%B0%EA%B0%80-%EC%98%A4%EB%9E%91%EC%BA%90-%EC%B2%AD%EC%97%90-%EC%B9%98%EC%9A%95%EC%9D%98-%ED%95%AD%EB%B3%B5%EC%9D%84-%ED%95%98%EB%8B%A4?category=337186 조선의 인조가 오랑캐 청에 치욕의 항복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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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경석(李景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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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과 굴욕으로 얼룩진 병자호란. 이 수모의 역사가 새겨진 삼전도비. 인조는 4명의 신하에게 삼전도비에 새길 비문 찬술을 명령하지만 아무도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명분으로 사는 조선시대에 항복비문의 작성은 개인과 집안의 수치일 뿐 아니라 후대까지 오명을 쓰는 일이었던 것이다.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난세를 앞서 헤쳐간 명재상,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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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한국사 傳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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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조선 시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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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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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과 신하들은 맞서 싸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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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약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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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조선보다 자신들이 뛰어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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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 비석을 만들라고 명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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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은 글을 쓰는 선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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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높이는 글을 쓰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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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가 그런 치욕적인 글을 쓰고 싶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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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조선 시대는 글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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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던 시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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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아무도 비석에 들어갈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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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쓰겠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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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경석이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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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비문을 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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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를 비겁하다고 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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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걸 쓰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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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청나라의 군대가 우리 백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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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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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차라리 나라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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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다는 욕을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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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은 슬픈 마음으로 어렵게 어렵게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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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들은 비석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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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을 비겁하다고 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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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불구하고 이경석은 이후로도 묵묵히 3명의 임금님을 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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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어려운 일들을 현명하게 해결해 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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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경석을 위해 임금님은 궤장이라는 지팡이와 의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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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했어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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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은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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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용기란, 자신의 명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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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백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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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과 나라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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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명예를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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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은, 모두에게 욕을 먹을 것을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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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백성을 위해 명예를 버렸으니
  
- 이경석은 왜 삼전도비문을 지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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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진짜 용기다.
삼전도비는 1639년(인조 17),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이다.  
 
바로 이 삼전도비문을 지은 사람이 명재상 이경석이다.
 
병자호란에 패했지만 여전히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섬기는 분위기가 팽배한 조선. 청나라는 조선이 스스로 비를 세우게 함으로써 조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 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개인과 집안의 명예 실추와 오명을 감수하며 항복비문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핵심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명문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경석 역시 마찬가지 상황!
 
만약 삼전도비문을 쓸 경우 자신 뿐 아니라 후대까지 불명예를 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경석은 왜, 무엇을 위해 삼전도비문을 지은 것일까?
 
  
- 개인의 명예인가, 국가의 존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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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은 어려운 시기에 진짜 용기로
조선시대 선비에게 글이란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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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어요.
인조에게 비문 찬술을 명령받은 4명의 신하들은 모두 당대의 문장가였지만 왕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웠고,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써 채택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이경석과 장유 두 사람의 글을 청나라에 보내지만 심한 질책과 함께 되돌아온다. 장유는 적절치 않은 인용문을 사용했고 이경석의 글은 너무 소략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시 이경석을 불러 간곡히 부탁하는 인조.
 
이경석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 삼전도비문 찬술은 조선 전체를 뒤흔드는 명분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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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와 관련된 유물들을 경기도 박물관에서
이경석이 영의정으로 국정을 총괄하던 효종 1년(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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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답니다.
조선을 경악케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효종이 왜군 침입의 대비란 명목으로 청나라가 엄격히 금지한 성곽수리를 시행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청은 곧 조사관을 파견했다.
 
효종과 백관을 협박하며 왕을 궁지로 모는 청사신. 이 때 이경석이 책임을 자청해 효종은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 다행히 이경석은 효종의 간청으로 간신히 극형을 면한 뒤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목숨을 걸고 청나라를 막은 이경석. 영의정이란 자신의 직분을 충실하게 이행한 이경석은 오늘날 공직자가 가장 본받아야 할 자세,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인물이었다.  
 
  
- 난세를 헤쳐간 삼조의 충신, 이경석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이경석의 묘.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나는 새것이고, 하나는 글귀가 깎여 글자가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비가 서있다. 땅에 묻혀있던 비를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생전에는 나라의 추앙을 받던 이경석. 그러나 사후엔 비조차 땅에 묻힌 이유가 무엇일까?  74세 되던 해, 현종에게 궤장을 받은 이경석. 궤장은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당시 50년 만에 이경석이 받은 것이었다.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른 3대의 임금을 모신 충신으로서 임금과 백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신하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평가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궤장수여식을 기념해 바친 글에서 이경석을 ‘절의 없는 사람’, ‘삼전도비문을 지어 아첨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소인배’로 비하시켰다.
 
청을 배격하고 명을 숭배한 존명배청론자의 대표인 송시열은 이경석의 삼전도비문 작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집권하면서 현재까지 이경석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승자의 시각으로 기록되고 전해지는 역사. 그러나 실리와 현실을 추구한 이경석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세대를 초월해 가장 필요한 인물이었다.
 
  
한국사전 19회 – 난세에 서다, 백헌 이경석 (2007.11.3.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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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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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100840000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이경석선생묘 (李景奭先生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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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igerati.aks.ac.kr/DhLab/2021/101/HunHyeok/graph/lee.htm 네트워크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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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harisu.tistory.com/26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의 기구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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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harisu.tistory.com/entry/%EC%A1%B0%EC%84%A0%EC%9D%98-%EC%9D%B8%EC%A1%B0%EA%B0%80-%EC%98%A4%EB%9E%91%EC%BA%90-%EC%B2%AD%EC%97%90-%EC%B9%98%EC%9A%95%EC%9D%98-%ED%95%AD%EB%B3%B5%EC%9D%84-%ED%95%98%EB%8B%A4?category=337186 조선의 인조가 오랑캐 청에 치욕의 항복을 하다.]

2021년 6월 12일 (토) 00:30 판

개요

  • 정의: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 생애 및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했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해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奉敎)·전적·예조좌랑·정언·교리 등을 두루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는 호당(湖堂)주 01)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또한 같은 해 말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면(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이 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해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 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1636년 병자호란 때 대사헌·부제학에 연달아 제수되어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며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렸다. 이듬해 문관으로서는 최대의 영예인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 인사를 주관하였다.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주 02)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다.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영부조용(永不調用)주 03)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판서 및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이에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이어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53년(효종 4)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68년(현종 9)에는 신하로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평생 『소학』과 『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했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가 지은 온갖 서적을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주 04)해 광화현란(光華絢爛)주 05)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豔)주 06)하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 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 동안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가, 사후에 특히 「삼전도비문」으로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저서로는 『백헌집』 등 유집 50여 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左相李廷龜碑文)」·「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경석(李景奭))]

이야기

옛날 조선 시대 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어요.

임금님과 신하들은 맞서 싸웠지만 힘이 약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죠.

청나라는 조선보다 자신들이 뛰어나다는 내용의 비석을 만들라고 명령했어요.

임금님은 글을 쓰는 선비들에게 청나라를 높이는 글을 쓰라고 했어요.

하지만, 누가 그런 치욕적인 글을 쓰고 싶겠어요? 더군다나 조선 시대는 글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시대였어요.

당연히 아무도 비석에 들어갈 글을 안 쓰겠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석이 말했어요.

“제가 이 비문을 쓰면 사람들은 저를 비겁하다고 욕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걸 쓰지 않는다면 다시 청나라의 군대가 우리 백성을 괴롭힐 것입니다.

저는 차라리 이 나라를 위해 비겁하다는 욕을 듣겠습니다.”

이경석은 슬픈 마음으로 어렵게 어렵게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비석을 보고 이경석을 비겁하다고 욕했어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이경석은 이후로도 묵묵히 3명의 임금님을 섬기며 나라의 어려운 일들을 현명하게 해결해 나갔어요.

그런 이경석을 위해 임금님은 궤장이라는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했어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임금님은 말했어요.

“참된 용기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고통받는 백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버리는 것이다.

이경석은, 모두에게 욕을 먹을 것을 알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명예를 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용기다.”

이경석은 어려운 시기에 진짜 용기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어요.

지금도 이와 관련된 유물들을 경기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답니다.


지식관계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