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연구와 콘텐츠 -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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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지리학 수업

2017학년도 제2학기

정치영 교수님

관련기사

수업 발표물

  • 조선시대 PPT
  • 일제강점기 PPT
  • 현대시대 PPT

기말 보고서

한국의 도시 경관 복원 연구 - 인사동 일대 중심으로

트와이닝 린지 지음

2017년 12월 22일

설론

인사동은 전통문화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종로의 중심이 되는 서울의 가장 역사가 깊은 동네 중에 하나이다. 인사동이라고 불리는 동네는 경복궁과 육조거리, 종로, 종묘, 창덕궁 등 조선의 제일 중요한 정치적 시설 사이에 위치 하였다. 이 동네의 일대에서는 절, 궁집, 관청 등이 자리 잡았으며 우정국로와 인사동길, 삼일대로, 돈화문로 등은 18세기 이전부터 중요한 교통 수단의 역할 하였다. 한말시기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로 이루어져 유명한 교육 시설과 종교 시설, 문화소비 시설 등이 폭발적으로 등장한다. 더불어 3.1독립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유적지를 지닌 동네이다. 현대시대로 와서 중요 교육 시설들이 이전됨으로써 점점 살려졌지만 대신에 소비문화가 발전시키는 상가와 대기업 사물실로 이용되는 고층건물들이 지어지게 되면서 국제적인 도시의 모습이 가지게 된다. 이렇게 인사동 일대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현대시대, 그리고 국제시대 한국의 도시 모습 모두 다 동시에 나타나게 됨으로써 한국의 도시 경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치가 뛰어난 동네이다.

인사동의 경관을 더 깊이 살펴보기 위해 조선시대 및 일제강점기, 현대시대 지도와 다양한 시기의 시각 자료를 연구 자원으로 삼아서 세종대로와 종묘, 율곡로와 종로 사이의 종로1∙2∙3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참고된 자료를 소개한 다음 주제별 경관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사동 일대의 경관을 종합적으로 복원한다.

연구 자료

인사동의 경관을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시각 자료를 모집해 보았다. 모집한 지도들은 먼저 소개하도록 한다. 총 46점의 지도를 주로 서울역사박물관의 온라인 아카이브나 서울시 지도 전시관에서 모집하였다. 이외에 미국의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Library Digital Map Collection에 속한 미군 지도도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지도는 18세기 중부터 시작되며 비교적으로 단순하여 정확하지 않으나 주요 도로∙수로망 및 행정구역명들을 확인 할 수 있다. 1750년대의 『도성대지도』와 같은 비교적으로 상세한 조선시대 지도 중에 관청, 궁집, 사찰, 유교 교육기관 등 확인이 된다. 일제강점기 지도는 1907년 『최신경성전도』와1922년 『경성도』, 1936년 『대경성정도』와 조감도인 『대경성부대관』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지도보다 훨신 세밀하고 정확하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도로 사이의 공간들이 공백으로 남겼지만 일제강점기 지도에서는 도로가 공백으로 남겨 건물 및 동네가 그려져 있다. 1936년도 『대경성부대관』는 그림형식의 지도이며 주요 건축물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해방 이후 1950년대는 미군용 지도와 도시계획도, 상가약도 등이 있으며 60년대부터 계획도와 국가에서 제공하는 기본적 지도가 있으므로 인사동 일대의 연대별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 자료들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의 건물들이 몇 년에 등록되었는지를 시각화로 표현하는 Seoul Building Explorer 이라는 서비스를 참고하였다.

사진자료는 1890년대부터 1989년까지 한 100년 걸친 한 60 점의 사진을 모집하였다. 사진 출처는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 아카이브와 서울시 서울사진아카이브,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국립민속박물관과 같은 정부기관∙박물관, 그리고 여러 개인의 블로그에서 찾았다. 그러나 출처표시 못한 블로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원본을 못 찾은 경우 누가 찍은 사진인지 알 수 없었다.

주제별 경관 복원

주제별로 경관을 복원하고자 한다. 살펴보도록 할 주제는 도로 및 수로, 학교, 종교 시설, 시장 및 상가, 문화 공간이다. 이 주제들을 바탕으로 인사동 일대를 살펴봄으로써 시대별 도심의 특징들을 더불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인사동의 널리 알려져 있는 ‘전통’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또는 어떤 면에서 현재까지 이루어졌는지도 모색하고자 한다.

도로 및 수로

도로는 도시의 척추가 된다. 인사동 일대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면에서 동네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으나 그 와중에 조선시대부터 제일 잘 유지된 요소는 바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인사동 일대의 현재 주요 경로는18세기부터(그리고 아마도 그 이전부터) 이루어진 길들이다. 근∙현대에서는 주요 도로가 추가적으로 건설 되었지만 조선시대의 주요 경로 중에 살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물론 이 주요 경로들이 근∙현대에 확장되었고 소로(小路) 중에는 새로운 건물을 건설하면서 살라졌지만 조선시대 주요 경로는 오늘도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도로를 언급하면 수로는 먼저 소개해야 된다. 최근 2015년에 복원된 중학천(삼청동천) 외에 인사동 일대에서 현존하는 수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여러 수로가 있었으며 이 수로에 따라 도로가 생겼다.

인사동 주변 수로는 백악산에서 청계천으로 흘린 자연 계곡이 원래 18세기에 4~5개 정도가 있었다. 참고한 지도 중에1753~9년도 제작된 『도성대지도』에서는 이 계곡들이 확인이 된다. 삼청동에서 청계천까지 육조거리의 뒷편에 남쪽으로 흐르는 2015년에 복원된 중학천(삼천동천)이 표시되어 있다. 현 인사동길에서는 ‘안국동천’이란 계곡이 있으며 이 계곡이 종로를 자나 서∙동 방향으로 종로5가까지 흘려 ‘옥류천’으로 합류된다. 또한 현 삼일대로(율곡로에서 낙원상사까지의 부분)와 탑골공원 동편에 있는 수표로로 이루어진 ‘회동천’이란 계곡이 있으며 종로 지나기 전에 서∙동 방향으로 안국동천처럼 옥류천으로 연결이 된다. 현 돈화문로 양쪽 골목에 남쪽으로 흐르는 계곡이 있었으며 서쪽 계곡은 ‘금위영천’이라고 하고 동쪽 계곡은 창덕궁의 금천인 ‘북영천’이라고 한다. 이 2 계곡은 종로 지나기 전에 회동천과 합류된다. 후대의 지도를 비교해 보면 생략된 수로들이 있으나 표시된 수로는 『도성대지도』와 형태가 유사하다. 1864년과 1907년대 사이에는 안국동천은 바로 청계천으로 연결이 되며 금위영천도 1914년 지도 이후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1910년대 후반에 살라진 것으로 보인다. 중학천 외에 나머진 수로는 마지막으로 1948년 미군 『AMS』지도에서 등장하며 중학천은 1957년에 복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58년『지번입서울특별시가지도』에서는 아직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인사동 일대의 모든 수로는 1950년대 끝나기 전에 복개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 수로 옆에는 조선시대부터 주요 길들이 있었다. 즉 이 수로 중심으로 조선의 도로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로 옆에 있는 길 외에 조선시대부터 중요한 길들이 8 개가 있었다. 현 종로, 세종대로, 율곡로(돈화문까지만)가 물론이고 동쪽부처 시작하자면 운현궁과 교동초등학교 사이에 동∙서로 돈화문로와 삼일대로를 연결하는 현 삼일대로32길, 조계사 및 종로타워가 자리 잡은 현 우정국로, 조계사 뒤편에 있는 현 율곡로4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동남쪽으로 종로까지 연결하는 종로5길, 그리고 율곡로에서 서남쪽으로 이마빌딩까지 이루어진 율곡로2길이 조선시대의 주요 경로였다.

일제시대부터 도시계획으로 인한 도로 확장 공사가 되며1910년대 후반에 현 우정국로가 넓게 확장되며 동시에 안국동 사거리도 황장된다. 1920년대 초반부터 ~1933년 전까지 원래 없던 동∙서 방향의 도로도 건설된다. 1921~6년 사이에 종로5길과 우정국로를 연결하는 현 삼봉로를 건설하며 1926~33년 사이에 우정국로와 인사동길을 연결하는 현 인사동5길을 건설하다. 1936년 『대경성부대관』에 의하면 원래 돈화문까지 연결할 계획이 있었으나 이 계획은 해방이후에 1950년대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후 1948년~1953년 사이에는[1] 또 새로운 도로가 건설된다. 이 시기에 건설된 도로는 현 낙원상가~종로까지 이루어진 삼일대로 하부, 현 종로3가역 5호선 지하철역 위치한 돈화문로 11길, 삼일대로와 돈화문로를 가로로 연결하는 삼일대로30길, 그리고 종로구청과 종로를 세로로 연결하는 종로3길 등이 있다.

그 이후로 인사동10길 등은 2000년대부터 지도에 표시되기 시작하지만 Seoul Building Explorer에 의하면 그 도로에 있는 건물들은 1940년대, 1980년대, 2000년대 등이 있으며 정확이 언제 건설되었는지 또는 확장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14년 『경성부명세신지도』와 1953년 『서울도시계획가로망도』에 의하면 종로1가를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안국동 사거리로 서남 ∙동북 방향으로 도로를 건설할 계획이 보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4년 『경성부명세신지도』에서 율곡로를 직선으로 바꾸려고 하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의도도 확인이 된다.

따라서 1950초반 이후로 도로 건설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도로, 일제강점기 1920년후반~1930년초반 사이의 도로 확장 및 건설, 그리고 해방 이후 1948년~53년 사이의 도로 건설로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다른 인사동 일대는 이렇게 도로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조선시대부터 남긴 흔적이 도로 밖에 거의 없기 때문에[2] 앞으로는 현재의 도로망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보존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학교

조선시대는 인사동 일대에서 교육기관 하나가 있었으며 바로 중학(中學)이다. 중학은 중부학당(中部學堂)의 줄인 말이며 조선시대 유교적 관립교육기관 사학(四學) 중에 하나였다. 중부학당은 조선시대1422년(세종 4)에 의정부 동쪽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그 위치에서는 현재 2012년에 완공된 더케이트윈타워가 서 있다. 중학과 의정부 사이에 흐르는 계곡 삼청동천은 ‘중학천’이라고도 불렀으며 현제까지도 구 중학의 주변의 동네는 ‘중학동’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가지고 있다.

한말시대 및 대한제국시대로 들어서서는 학교들이 점점 설립되기 시작한다. 1890년대는 교동초등학교의 전신인 교동왕실학교가 설립되어 본관이 1906년에 완공되었다. 비슷한시기에 현 KT광화문지사 자리에 1895년에 설립된 법학전문학교가 1903년에 이전이 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능약 이전에 4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되는데 서북협회의 서북협성학교 (건국대학교 구 본관 자리), 중동학교, 숙명여자고∙대학교 전신인 명신여학교, 그리고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동덕여자학교 등이 포함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는 7개의 학교가 이 일대에 선립되며 이 중에 3개는 공립이고 3개는 사립이고 하나는 미상이다. 제일 먼저 1911년에 들어온 학교는 일본인들이 다녔던 종로소학교이며, 그 이후로 1922년에 수송보통학교, 1935년에 여자사범학교 및 부속보통교가 설립된다.[3] 사립대학교는 삼흥보통학교와 태화여자학교, 수송전기공업고교가 있다. 삼흥보통학교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으며 『대경성부대관』에서만 표시되어 있다. 태화여자학교는 감리교선교부가 1921년에 태화관을 매입하여 여성과 아동을 위한 ‘부인 구락부’ 등을 여성 선교사들이 운영하였던 것이다.[4] 그리고 일제강점기 말에 설립된 수송전기공업고교은 지도자료로 확인했을 때 구 여자사범학교 부속보통교가 있던 건물을 사용하여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대경성부대관에서』 확인이되지만 정보가 미흡한 현 서울중앙교회∙텝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에 위치하였던 ‘여자상업학교’는1926~1936년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보이나 그 위치에 있었던 여자상업학교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해방 이전에 설립한 학교 중에 교동초등학교만 남아 있으며 다른 학교들은 폐교되거나 다른 학교로 인수, 다른 곳으로 이전이 되었다. 해방 이전에 동덕여자학교가 1933년에 창신동으로 이전되고 법학전문학교는 1938년에 서울대법학대로 인수되었다. 한국전쟁 이전1946년에 여자사범학교도 서울대사범대로 인수 되고 구 서북협회회관은 건국대학교 본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비슷한 시기에 덕성여자대학교가 운현궁 터에 건립되었다. 20년이 자나 1972년에 종로소학교가 폐교되며 1977년에 서북협회회관도 해체되고 수송보통학교가 이전되며 그 다음 해 수송전기공업고교도 이전된다. 1980년 초에 나머진 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중동학교, 덕성여자대학교가 이전되고 건국대학교 관진구 캠퍼스에서 서북협회회관 건물을 복원한다. 덕성여자대학교가 이전되었으나 종로 캠퍼스 아직 운영하고 있으며 운현초등학교도 설립하였다. 태화여자학교는 복지재단으로 변형하여 아직까지 운영하고 있다.

참고 지도에 등장한 학교

학교명 유형 성별 현 위치 개교 준공 폐교 이전 후신 기타
중부학당 공립 더케이트윈타워 고려 1422 한말
교동왕실학교 공립 교동초등학교 1894 1906, 1921, 1928, 1977 교동초등학교
법학전문학교 공립 KT광화문지사 1895 1903 1938 서울대법학대 청량리중학교 자리로 이전
서북협성학교 사립 건국 주차장 1905 1908 1977 1985 건국대학교 1910 오성학교로 개명, 1927 협성실업학교로 개편, 1946 건국대학교 인수
중동학교 사립 SK건설, 수송공원 1906 1984 중동고등학교 강남구 일원동으로 이전
명신여학교 사립 코리안리재보험빌딩 1906 1981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대학교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전
동덕여자학교 사립 동덕빌딩 1908 1933 동대문 창신동으로 이전
종로소학교 공립 두산위브파빌리온 오피스텔, G타워 1911 1972[5]
삼흥보통학교 사립 시그나타워(?) 1914 ? 백완혁 외 설립, 1906년경 안중근이 세운 삼흥학교의 후신?[6]
태화여자학교 사립 태화빌딩 1921 사회복지기관 태화여자관' 전 순화궁, 태화관 자리, 감리교선교부 1921년 매입, 태화기독교사회관
수송보통학교 공립 종로구청 1922 1977 서울수송초등학교 2001 재개교
여자사범학교 부속보통교 공립 서울노인복지센터, 서머셋팰리스 서울 1935 1946 서울대사범대학 *1921지도에 등장
수송전기공업고교 사립 ? 서머셋팰리스 서울 1941 1978 성동구 중곡동으로 이전
여자상업학교 ? 서울중앙교회, 텝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 ? ? 1926~1936?
덕성여자대학교 사립 덕성여자대학교 종로캠퍼스 1950 1984 도봉구로 이전
운현초등학교 사립 남녀 덕성여자대학교 종로캠퍼스 1985 덕성여대로 인해 설립이 됨

이렇게 원래 일제강점기에13개의 학교가 있었던 동네는 현재 (덕성여대를 포함하면) 학교 3개 밖에 없다. 1977~85년 사이에 수 많은 학교들이 이전되면서 인사동 일대의 성격이 많이 달라진 것이 추측할 수 있다. 이 학교들이 이전된 후 건물들을 허물고 대한제국, 일제 식민, 그리고 근대교육 기원의 많은 유적들을 없앴다.

종교적 공간

인사동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종교적 시설이 있었다. 조선이 성리학중심으로 다르시는 정권이라 모든 관청 및 궁중 시설들이 유교와 관련이 있었다. 인사동 동쪽으로 종묘가 있었으며 유교 교육기관인 중부학당 등도 있었다. 그러나 종묘 외에 유교 시설들이 대한제국 이후로 살라진다. 현재 수송공원 옆에 있는 이색(李穡)의 초상 소본을 모신 사당이 있으나 이 건물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불교도 이 동네에 오래된 역사를 지난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인사동의 제일 유명한 랜드마크가 바로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제2호의 국보이며 1467에 세워졌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위치한 현 탑골공원의 터는 역사가 깊고 다양한 성격을 가졌다. 고려시대는 흥복사라는 절이 이 터에 있었으며 조선시대로 진입하여서는 세조가1457년 폐사해서 그 자리에 ‘악학도감’이란 음악기관이 두었다가 1464년에 원각사를 창건하게 명령하였다. 40년 뒤 1504년에 연산군이 원각사를 기방으로 만들다가 1512년에 헐어서 그 재목을 나누어 절은 없어졌다. 그러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남았으며 『조선성시도』, 『한양전도』와 같은 18세기후반에 제작된 지도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당시에 궁궐문이나 사대문만큼 한양의 중요한 랜드마크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말에는 미국인 Percival Lowell에 의하면 십층석탑이 ‘어떤 사람의 마당에 있는 방치된 장식 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7] 1897년에 영국인 총세무사John McLeavy Brown이 십층석탑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그에 의해 고종이 이 곳을 한국의 최초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이 공원의 이름은 ‘탑’의 영어발음 ‘pagoda’를 사용하여 파고다(또는 빠고다)공원이라고 하였다.

1910년에 조선의 억불정책 이후로 4개문안에 처음 세워진 절은 현 수송공원에 위치하였던 각황사이다. 이 사찰은 조계사가 1938년에 세우기 전까지 경성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1938년에 서울 밖에 있었던 태고사를 이전하면서 각황사가 철거되었다. 태고사는 나중에 조계사로 개명하여 현재까지 이루어지며 조계사 주변에 템플스테이 시설 및 많은 사찰음식점들이 설립되었다.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기독교 유적지는 명동 성당, 정동, 등이 있으며 그 중에 인사동도 중요한 기독교 유적지이다. 서울기독교청년회(YMCA)가 물론이고 승동교회, 태화관 등이 종로 2가에 여러 기독교와 관련한 기관들이 몰려 있다.

승동교회는 1984년에 설립되었으며 현 교회 건물이1904년에 세워졌다. 1919년 2월에 교회 지하에서 전문학교 대표들이 3∙1운동 지침에 대해 논의하였고 또한 1922년에 여기서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서울기독교청년회(YMCA)는 1901년에 창립되었으며 1908년에 현대식 건물이 세워졌다. 그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는데 현 건물이 1965년에 완공되었다.

태화관은 민족대표 33인이 모아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와 관련 유적지이기도 한다. 태화관은 원래 순화궁이라는 왕족 집이었는데 한일합병 직후 일제정부에 의해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1913년부터 ‘명월관’의 분점으로 이용되었고 세조 때에 이 곳에 있었던 정자의 이름 ‘태화정’을 살려서 ‘태화관’이라고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후이완용 소유에서 독립선언식이 본인의 소유 건물에서 이루어졌던 것에 대해 부담을 느껴서 1920년에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부의 선교사 마이어즈에게 판매를 하였다. 그 이후로는 한국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태화여학교로 이용해 왔으며 현재는 그 자리에 태화복지재단의 소유인 고층건물이 있으나 이 건물 이름은 ‘태화빌딩’이라고 한다.[8]

이 3개의 건물들은 삼각형 모양으로 각 150~170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때문에 3∙1운동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고 일제시대 내내 이 구역은 기독교일들이 많이 몰렸던 곳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1운동에서 중요한 역할 하였던 천도교도 인사동과 연계가 깊다. 동학은 1905년에 천도교로 개칭되었으며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18~1921공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모든 대표적인 종교들이 한 동네에서 볼 수 있으며 한국에서 드문 형상이다.

시장 및 상가

인사동의 경계 중에 하나가 되는 종로는 조선시대의 중심 시장이었다. 일제시대로 진입하여서도 상업의 중심이 계속되었다. 1921년도 1/10,000 지도와 1936년 『대경성부대관』에 의하면 현 대성 스카이렉스 빌딩∙견지동빌딩와 현 돈의동 103-2번의 자리에 시장이 있었던 것이 확인이 된다. 『대경성부대관』에 의해 길성지물포, 1931년에 현 종로타워의 자리에 화신백화점이 설립되다가 불로 타서 다시 1937년에 새로 지었다. 1934년에 수입품을 취급하던 가게 남계양행도 그 근처에 설립되었으며 아직도 남아 있다.

1967년에 낙원상가와 파고다아케이드는 착공하여 파고다아케이드가 같은 해에 완공되고 낙원상사는 1970년에 완공되었다. 파고다아케이는 한 10년 뒤1980년대 초에 철거 되었으나 낙원상가는 아직도 유명한 악기상가로 운영되고 있다.

1970~80년대에도 인사동길은 전통 도예, 전통 가구 등과 관련한 가계들이 있었으며 현재는 인사길에서는 화장품 및 악세서리 가계, 관광객들 위한 전통 기념품 가계, 미술 가계, 한복 대여 가계, 카페, 음식점 등이 있으며 종로1∙2가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가예들이 남았다. 낙원상가가 남아 있으며 종로 3가에서는 피카디리 귀금속상가와 음식거리가 있다. 종로3가역 근처 돈화문로에서 국악사 거리가 있으며 최근에 그 주변 익선동에도 옷가계 등이 입점하기 시작되었다.

문화 공간

인사동 일대는 일제시대부터 문화공간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극장, 대규모 요리집 및 기방, 도서관, 박물관 등이 인사동 일대에 설립이 된다. 1920년에 파고다공원 서쪽(현 삼일대로)에 한국의 최조 근대적 도서관인 종로도서관이 옛 국악대 건물에 설립되었으며1922년에 영화∙극장인 조선극장도 길 건너 세워졌다. 조선극장은 1936년에 화재로 없어지고 종로도서관은 파고다아케이드 건축계획 등으로 인해 1967년에 사직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도서와 관련하여 현 안국 사거리에 '이문당'이란 서점 겸 출판사이 1916에 설립되었고[9] 훨씬 후 1980년대에 광화문사거리 교보문고도 생겼다.

조선극장 외에 종로3가 사거리에 위치하여 마주보던 한국의 최초의 상설 영화관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도 각각 1907년과 1958년에 세웠다. 현재는 걸물들이 새로 건축하였으나 체인점 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69년에낙원상가에서도 ‘허리우드’란 극장이 개관되었다.

피카디리극장 터에는 극장 세우기전에 유명한 대규모 요리집인 명월관이 있었다.[10] 명월관은 궁중요리 하던 안순환이 1909년에 광화문 근처에 세웠으며 그 당시 최고의 기생관으로 유명하였다. 1913년에 이완용의 수요인 순화궁을 임대하여 지점을 입점하였으며 그 곳에 있었던 정자의 이름 ‘태화정’을 사용하여 ‘태화관’이하고 하였다. 1919년에 명월관 본점이 불탄 이후 피카디리극장 자리로 이전되었고 같은 해 태화관에서 1919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된 이후 1920년에 남감리교의 소유가 되었다. 명월관이 이전된 곳 근처(현 돈의동 103-2번 근처)에서도 열빈루란 요리집 겸 기생관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도 종로3가역주변에 많은 요리집들이 들어서 있다.

현재는 인사동이 미술관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며 인사동 주변의 첫 미술관은 운현궁과 창덕궁 사이에 이왕가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왕가박물관은 파고다 공원처럼 영국Brown에 의해 세워졌으며 1901년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1907 년에 완공되었다.[11] 현재는 많은 소규모 미술관들이 있으나 그 중에 태극이 디자인하던 박영호의 옛집 터에 있는 경인미술관, 한국공예문화진흥원 등이 있다.

결론

인사동 일대를 살펴봄으로써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 일제강점기, 독제시대, 현재 시대 등 다양한 시기의 한국의 도심 모습을 알 수 있고 변화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도심인 인사동 일대는 1층 기와집 형식의 관청과 궁집(왕족 집), 일반인의 집, 그리고 시장으로 이루어졌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조선 후기 유고 나라의 수도인 한양의 유일한 불교 흔적이었으나 이 것도 역시 일반인의 집 안으로 소유가 되었다.

대한제국시기부터 인사동 일대는 많은 변화가 있다. 이 시기부터 서양의 영향이 급속히 들어났다. 공립과 사립 근대 교육기관, 왕립 미술관, 서양식 공원 등이 설립된다. 이 일들은 고종이 존경했던 서양 외교관들에 의해 많이 이루어졌다. 또한 기독교인 들이 종로2가에 있는 대규모 다층 근대식 건물인 서울기독교청년회, 승동교회 등에 머물게 되었다. 이 당시에 청년회 옆에 한성전기회사 사옥의 근대식 건물도 건축되었다.[12] 이러한 건물들은 종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어 한양의 중심이 서양적인 모습을 가지기 하였다. 그러나 종로와 육조 거리 주변 외에 인사동 일대가 아직도 상층의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상층의 사회적 지도자들이 사는 동네에 서양식 종교∙이념이 도입됨으로써 한일합병 체결하기 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 3∙1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치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로 진입하여서는 인사동 일대의 성격이 다양해지다. 원래 주로 관청과 주거의 공간이었으나 극장, 영화관, 도서관, 백화점, 요리점 등이 지어지며 종교적인 면에서도 각황사와 천도교중앙대교당도 세워지면서 인사동의 다양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이 시기는 현재 인사동 일대의 성격의 형성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교육기관들이 대한제국시대와 이어서 계속 많아지면서 삼청동, 정동과 같이 공∙사교육의 중심지가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한 이유 중에 하나가 궁집(일부)과 관청들이 일본정부나 친일파의 소유가 되면서 학교나 문화공간 등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해방 이후는 1960년대까지 상당한 도로 공사 등이 있었으나 분위기 상으로는 일제강점기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인사동 일대는 경제개발 중심으로 상가 및 교통과 관련한 시설들이 건설된다. 1960년대 후반에 낙원상가와 파고다아케이드가 건설이 되었으며 그 이루 1970년 초반에 종로에 지하철 1호선 공사가 이루어진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는 50년 이상동안 자리 잡았던 학교들이 폐교나 이전이 되어 그 자리에 고층 건물들이 지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는 YMCA나 교동초등학교도 일제시대 건물을 새롭게 건축하는 일도 있다. 극장이나 영화관과 같은 문화공간들도 또 많아진다. 즉,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인사동 일대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상업 및 소비의 의 구역으로 점점 성격이 바꾸게 되는 시기이다. 1980년대 이후로는 급속한 변화가 없으나 전통 한옥집들이 계속 살라지면서 다층이나 고층건물이 대신에 들어서게 된다.

인사동은 원래 외국인들이 관심 가졌던 동네였지만 한류(특히 사극)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더 많이 방문하게 되었다. 도예, 전통 가구 등과 관련한 가계들도 있었고 경복궁, 창덕궁, 종료 사이에 있는 인사동이 전통 관광지로 브랜딩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관광지를 되면서 한국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카페∙고급요리점∙옷부틱, 해외 관광객들이 찾는 기념품∙화장품 가계 등이 많이 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사동 일대의 가장 갑작스럽고 극도의 변화가 최근 2000년부터에 이루어졌다. 바로 종로 1가의 재개발 사업이다. 수 많은 건물들을 한꺼번에 다 허물고 대신에 5개의 상가가 있는 커다란 고층건물을 세웠다. 이 사업은 혁신적이고, 국제적이고, 편리하고, 새로운 도시의 상징이 된다. 이 공사하는 과정에서 고고학 발굴을 통해 조선시대 유물도 발견하여 전시하였지만 이 재개발으로 인해 동네의 조선역사 일부와 근∙현대 역사의 모든 흔적들이 다 없어졌다. 서양에서 옛날 건물들을 보수하려는 선향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근현대시대를 아프고 힘든 시기라고 생각해서 그 시대의 건축물들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지, 지금과 미래의 생활방식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역사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건축물, 골목 등을 없애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안 느끼기 때문인지, 단순히 재산이 있는 회사들이 원하대로 역사를 없어지기 때문인지, 공사는 습관이 되어서 공사하는 것이 당연하고 항상 이루어져야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다양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로1가에서 이런 변화가 이미 마무리가 되었는데 다음에는 종로3가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종로3가에서는 작은 규모의 근∙현대 한국식∙서양식 건물이 많으며 주로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곳이다. 이미 종로3가 근처에 있는 익선동에서 고택화(gentrification)의 형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동네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이 동네도 다 허물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정부가 역사나 전통, 문화유산, ‘한국’다운 것에 대해 많이 자랑하려고 하는 동시에 이렇게 역사가 깊은 동네의 역사적 흔적을 지우면서도 오래전에 없어졌던 건물들을 억지로 다시 복원하는 작업을 한다. 이면에서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명확하지 않으며 이런 일들이 국민들과 외국인들의 한국 역사에 대한 인식에 대해 어떠한 부작용을 주는지도 아직 알 수 없다.

특히 인사동 일대는 보기 드물게도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 일제강점기, 현대시대, 그리고 지금까지의 도시 모습을 다 가지는 곳이라 재개발 등에 대해서 더욱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사동의 다양한 역사성을 언급하면서 한국 국민들이 자기나라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질 수 있게끔 역사 교육 등을 경쟁을 위해서 아니라 국민들 만들기 위해서 제대로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1. 이 시기의 지도는 서로 다른 정보를 표시합니다. 1950년대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 『서울도시계획공원변경전∙후계획도』와 1953년에 제작된 『서울도시계획가로망도』 에서 표시되어 있지만 1955년에 제작된 『서울상계약도』와 1950년중 『Seoul Road Map』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의 지도들은 그 이전의 지도를 바탕으로 그려져서 도로 신공을 보여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지도 자료를 고려하면 이 공사는 확실히 1948~58년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2. 이 외에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우정총국, 승동교회, 탑골공원(원각사지 십층석탑, 팔각정), 운현궁 및 운니동김승현가 이 6개의 시설 외에 없는 걸로 확인된다.
  3. 여자사범학교 및 부속보통교는 여러 가지 온라인정보에 의하면 경성사법학교는 1921년에 설립되고1935년에 여자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1921년 지도와 1933년지도에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한 곳에 표시되어 있지 안고 현 서울노인복지센터와 서머셋팰리스 서울의 자리에 표시되어 있어서 이에 대해 연구가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4. 태화복지재단, 「역사」 http://www.taiwhafound.org/foundationintro/history_gallery/42?page=4
  5. 공식적인 정보가 못 찾았지만 서울종로국민학교 동문 카페에 의하면 마지막 졸업생은 1972년에 졸업했다고 하니 1972년에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http://cafe430.daum.net/_c21_/home?grpid=1HV21
  6. 강명숙, 『사립 학교의 기원』, 「표 3-2 사립보통학교 설립 인가 학교 목록」
  7. “…now it is but a neglected ornament on a certain man’s backyard” – Percival Lowell, J. S. Gale. 1915. “The Pagoda of Seoul.” Transactions,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Vol IV Part II (via Brother Anthony's website)
  8. 태화복지재단, 「역사」 http://www.taiwhafound.org/foundationintro/history_gallery/42?page=4
  9. 한국민족문화대박화사전, 「이문당
  10. 중앙일보,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 명월관의 궁중 요리, 황제가 되어 보려는 욕망을 자극하다」 “1903년 광화문 현 동아일보사 자리에서 문을 연 명월관은 일제 강점 이후 현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에 지점을 냈다. 인사동 명월관 지점은 3·1운동 당일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19년 광화문의 본점이 불에 탄 뒤 안순환은 지금의 서울 종로 피카디리극장 자리로 본점을 옮겼다.”
  11.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 근,현대미술관사 연구- 국립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모순의 근원을 중심으로
  12. 바죠, 2007, 「‘한성전기사옥’(전 종로경찰서자리)의 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