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0011
| 주요 정보 | |
|---|---|
| 이칭·별칭 | 둔산식 집자리 |
| 키워드 | 집자리, 주춧돌, 돌 두름식 화덕 자리, 구덩이 |
| 시대 | 청동기 |
| 위치 | 대한민국 |
| 지역 | 서울 가락동 유적 |
| 수록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
| 집필자 | 이형원 |
| 상세 정보 | |
| 성격 | 유적 |
설명
가락동식 집자리는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평면의 집자리 내부에 돌 두름식 화덕 자리(圍石式爐址 또는 土壙圍石式爐址)와 기둥을 세우는 주춧돌(礎石) 이 있는 청동기 시대 집자리의 한 형식이다. 돌두름식 화덕 자리나 주춧돌 이외에 구덩이(竪穴)가 있는 경우가 많다. 가락동식 집자리의 원래의 명칭은 가락동 유형의 주거 형식으로서 둔산식 집자리(屯山式住居址)로 설정되었다. 가락동 유형의 집자리를 가락동식 집자리로 명명하면 적절했을 것이지만, 겹아가리(二重口緣)에 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를 새긴 가락동식 토기가 출토된 서울 가락동 유적의 발굴에서는 돌 두름식 화덕자리나 주춧돌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전 둔산동 유적의 집자리를 대표 형식으로한 것이다. ‘둔산식 집자리’와 ‘가락동식 집자리’를 같은 개념으로 쓰는 연구자들이 많은데, 결국 가락동식 집자리와 둔산식 집자리는 가락동 유형의 집자리로서 혼용되고 있는 같은 개념이다. ‘가락동 유형’의 토기는 ‘가락동식 토기’로, 집자리는 ‘가락동식 집자리’로 부르는것이 용어상의 혼란을 피하는 방편이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 가운데 가락동식 집자리는 돌 두름식 화덕 자리와 초석을 이용한 기둥 배치 방식이 특징이며, 이와 비슷한 시기의 역삼동식 집자리(또는 관산리식 집자리)는 돌을 쓰지 않은 구덩식(竪穴式)이나 평지식(平地式)의 화덕 자리와 기둥 구멍을 이용한 기둥 배치 방식이어서 두 형식의 집자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한편 돌 깐 돌 두름식 화덕 자리(石床圍石式爐址)를 특징으로 하는 미사리식 집자리는 가락동식 집자리와 비슷한 형태이다. 가락동식 집자리는 금강 중상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고, 구릉에 분포하는 사례가 많은데 비해 미사리식 집자리는 한강 유역과 남강 유역 등의 강변 충적지에서 많이 확인되는 것이 차이점이다. 가락동식 집자리를 비롯하여 역삼동식 집자리와 미사리식 집자리는 그와 같은 형태의 가옥을 축조하고 사용한 집단들이 일정 기간 동안 상호 작용하면서 가옥의 세부 속성이 변하는 문화 변용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가락동식 집자리는 남한 지역에 전체적으로 분포하지만 역삼동식 집자리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서울·경기 지역과 충청 북서부 지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일부 연구자는 돌 두름식 화덕 자리와 주춧돌, 그리고 저장 구덩이가 있는 남한강 유역의 집자리를 ‘조동리식 집자리’로 부르기도 하는데, 형태로 볼 때 가락동식 집자리와 별다른 차이는 없다. 가락동식 집자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방형에서 세장방형으로 변화하며 이와 함께 화덕의 수도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집자리 가운데에는 가옥을 개축하거나 확장한 흔적도 자주 확인된다. 가옥의 확장을 통한 규모의 확대는 가구 구성원의 수가 증가하는 것과 연동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연구가 있다.
가락동식 집자리는 기원전 13~9세기에 존속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서북한 지역 청천강 유역의 주거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 주거 문화를 규명하는데 가락동식 집자리의 고고학적 가치는 매우 높다. 청주 학평리 유적의 가락동식 집자리에서 청동 검이 출토되었는데 서북한 지역의 비파형동검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 집자리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집자리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