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바위그림[靑銅器時代岩刻畵]
| 주요 정보 | |
|---|---|
| 이칭·별칭 | 암각화 |
| 키워드 | 고인돌, 선돌, 집자리, 농경, 수렵, 패형 바위그림 |
| 시대 | 청동기 |
| 위치 | 대한민국 |
| 지역 | 경주 상신리 바위그림 |
| 수록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
| 집필자 | 이상길 |
| 상세 정보 | |
| 성격 | 유적 |
설명
바위그림은 선사 시대 사람들의 주술과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럽과 시베리아, 몽골, 중국 등 세계 각지에 분포하는데, 한반도에서는 현재까지 30여 개소 이상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표현 기법상 암각(岩刻, carvimg, graving)과 암채(岩彩, painting)로 구분되나, 편의상 바위그림(岩刻畵, petroglyphs)으로 통칭되며, 한반도의 바위그림(rock art)은 모두 암각(carvimg)된 것이다.
바위그림은 고인돌 상석, 묘역식 고인돌의 묘역 기단 석렬, 선돌, 하천이나 물가의 암벽, 집자리 출토 석재 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유적의 입지가 전체 생활 공간 가운데에서 은밀한 곳이고, 바위그림 앞의 공간이 매우 좁은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의 행위는 대중이 아닌 특정 소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이곳이 따로 독립된 봉우리인 점을 감안하면 이 지역은 일반인들이 평상시에 접근하지 않는 특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암각의 표현 방법과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개의 군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사실적 표현으로서 울산 대곡리 바위그림, 포항 인비동 고인돌, 여수 오림동 고인돌에서 확인되는 그림이다. 사실적이고 생동적인 동물의 표현, 인물의 전신상이나 사냥하는 모습,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모습, 인물상에서 성기의 표현, 간 돌검과 돌살촉의 표현, 무릎을 꿇고 의례를 지내는 인물 모습 등이 특징이다. 특히 활을 들고 사냥하는 모습이나 생동적인 동물의 표현은 중국 북부나 몽골, 시베리아의 초원 지대 바위그림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수렵 생활과 관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 철기 시대 청동기에 새겨진 모습이지만 전 경주 출토 견갑형 동기에서 묘사된 화살을 맞은 사슴 모습도 수렵 의례와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바위그림과 관련된 수렵 의례를 논의할 때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고래를 잡는 모습이나 고래, 거북, 물개 등 바다 동물 그림에서는 어로 생활과 관련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반구대에서는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인물상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인물상은 몽골 초원 지대 바위그림에서 보이는 샤먼(shaman)의 모습을 떠올린다. 반구대 암각화에 묘사된 인물상은 이러한 점에서 의례와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연속 마름모꼴을 비롯한 각종의 기하학적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울산 천전리 바위그림에서 보인다. 풍요나 생명력 등 농경과 관련된 도상(圖像)으로 파악하는 연구자도 있으나 그 상징성과 의미에 대해서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셋째는 사람의 얼굴 또는 신상(神像)으로 추정되는 문양의 바위그림으로 고령 장기리(양전리) 바위그림, 고령 안화리, 포항 칠포리, 남원 대곡리, 영천 보성리, 경주 석장동, 경주 상신리, 영주 가흥동 등의 유적에서 확인 되었다. 도식적으로 표현된 추정 신상+동심원+알 구멍(性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추정 신상은 유적별로 세부적인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추정 신상은 ‘패(牌) 모양’ 혹은 ‘방패 모양’으로 불리는 형상이 주류를 이루는데, 넓은 지역에 걸쳐 있으면서 형태적으로 서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어 이를 제작한 당시의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있던 어떤 이미지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 형태가 당시인에게 있어 신의 모습, 즉 신체(神體)를 표현하였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이 외에도 바위그림이 발견된 예로서 포항 인비동 고인돌(간 돌검과 돌살촉), 여수 오림동 고인돌(사람, 간 돌검), 함안 도항리 고인돌(동심원, 알 구멍)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인돌의 덮개돌(上石)에 새겨진 경우이며, 그 내용도 무구(武具)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앞서의 경우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또 부여 송국리 1호 돌널무덤의 덮개돌(蓋石)과 보성 동촌리 고인돌 매장 주체부의 하부 덮개돌(蓋石)과 돌널무덤 내부의 벽에서도 알 구멍이 다수 확인된 바 있다. 또 대구 진천동 선돌의 경우에는 선돌에 나선형 혹은 동심원 문양과 알 구멍이 새겨져 있다. 대구 진천동 선돌의 바위그림는 주변에서 돌널무덤이 발견되어 장례나 제사 의례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존하는 바위그림의 실물 자료만을 토대로 그 행위를 복원하는 작업은 용이하지 않으나 지금까지의 검토를 토대로 하여 대체로 살펴본 의례 행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적의 입지가 생활 공간 가운데에서도 매우 은밀한 곳이거나, 혹은 독립된 봉우리로 주위에 공간이 거의 확보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러한 행위는 대중이 아닌 특정 소수를 대상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패형(牌形) 바위그림을 기획·도안하고 제작한 사람은 의례와 관련된 기원자(祈願者)가 아니라 샤먼과 같은 특정인이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러 지역에서 동일한 모티프를 가진 공통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고, 한 지역에서도 거의 유사한 형태가 반복해서 제작된 점으로 보아 이러한 형상을 공유하고 전하면서 표현할 수 있는 자는 특별한 지위에 있으면서 그들끼리만 통하는 어떤 관념이 있었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셋째, 의례의 구체적인 행위는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샤먼 등의 특정인이 패형 신체(神體)의 기본적인 윤곽을 쪼은 후, 기원자가 거기에 덧대어 가는 행위를 계속했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현재 미완성처럼 쫀 윤곽만 남아 있는 것도 있고, 윤곽의 골이 넓고 깊어진 것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현재 미완성처럼 보이는 패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작 도중에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신체로서 묘사된 것이면, 이것은 완성된 형태의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기원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밝히기 어렵다. 시베리아나 예니세이강 유역 등에서는 이것을 수렵과 관련된 의례로 보고 있으나 한반도 남부 지역의 당시 사회가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이고 이들 유적의 입지가 대체로 물과 관련이 깊은 것을 감안한다면 농경과 관련된 의례일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 시대 농경 사회에서 사용된 고인돌의 상석에 구상적·사실적 문양이 나타나며 하천가 암벽에서 기하학·추상적인 문양도 나타난다. 포획 대상인 동물의 특성을 의례 과정에서 효율적으로 확인하고 교육하기 위해 생업 의례에 사용된 반구대 바위그림에서는 구상적·사실적 동물 모습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부장 유물이나 의례 모습을 고인돌 덮개돌에 새기는 것은 장례와 제사 의례일 가능성(여수 오림동 고인돌, 포항 인비동 고인돌)이 있으며 제단으로 둘러싸인 입석에 바위그림을 새긴 것도 인근에서 발굴된 돌널무덤의 존재 등을 고려할 때 장례 혹은 제사 의례와 관련될 가능성(대구 진천동 선돌)이 있다. 그러나 울산 천전리 바위그림이나 고령 장기리 바위그림은 추상적 문양으로 의례의 대상물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청동기 시대 의례의 종류에 따라 동일한 시대에도 구상적인 바위그림과 추상적 바위그림이 다양하게 쓰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북부나 알타이 지역의 바위그림은 동물을 사냥하는 그림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수렵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광시좡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나 윈난성(雲南省)에서는 취락, 전쟁이나 목축, 무용과 제사 등을 표현한 바위그림이 주로 그려져 있다. 북부 초원 지대의 바위그림은 한반도의 울산 반구대와 유사한 점이 많다. 대곡리 역시 바다 동물을 포획하거나 육지 동물을 사냥하는 어로와 수렵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이 바위그림을 새긴 집단의 수렵과 어로 활동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농경이 본격화되고 확산되는 청동기 시대에도 지역에 따라 생업에서 차지하는 수렵과 어로의 비중이 상당하였고 다양하였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바위그림 사람 얼굴(人面)은 외형적인 형태로는 한반도의 신상(神像)과 유사하다. 더구나 굴포리 유적이나 리돕카(лидовска) 유적에서 출토되는 사람 모양의 흙 인형은 여러 특징에서 칠포리 등의 신상과 흡사하다. 따라서 고령 장기리를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신상은 인물상이 도식적이고 추상적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시베리아 샤먼의 무복(巫服)은 접신(接神)할 당시의 샤먼의 외형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그 자체를 사람의 신체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무복은 가장 중요한 무구(巫具)로서, 악령으로부터 보호되는 갑옷이나 방패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점도 바위그림의 신상과 연결될지도 모르겠다.
수렵 사회에서는 사냥의 직접적인 대상물을 새기고 그것을 통해 주술적, 기원적으로 행해지던 의례가 일반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식량을 조달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목적에 충실히 따르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는 부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몽골 등 초원 지대의 바위그림은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그것이 신석기 시대이건 청동기 시대이건 간에, 그 사회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경우 정착 생활과 함께 농경이 시작되면서 생활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나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깨달아 가게 되면서, 인간은 절대적인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자연물에 영적인 힘이 존재하고 있다는 초보적인 단계의 믿음이나 개인적인 주술·기원이 아닌, 집단이 공유하면서 숭배할 수 있는 보다 강하고 구체적이며 포괄적인 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청동기 시대 한반도 남부 지역은 농업 생산을 주요한 경제 활동으로 하는 정착 농경 사회로서 고인돌은 정착 농경 사회의 기념물이다. 농경 활동의 공간인 집단의 영역을 배타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고인돌을 축조하고 고인돌과 관련된 장례와 제사 의례 속에 추가적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 고인돌 덮개돌이나 묘역 석열 등에서 확인되는 바위그림일 가능성이 있다. 농경 활동에서는 가경지(可耕地)와 함께 물의 확보가 그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농경을 주로 하는 이들 바위그림 제작 집단에게 물은 그 자체가 중요 자원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가 농경 사회이고, 바위그림의 제작이 이러한 농경과 관련하여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 물의 중요성과 더불어 농경 사회가 되었을지라도 오랜 기간 내려온 생업 수단이었던 수렵과 어로가 청동기 시대의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지역도 다수 있었을 것임으로 중층적 상징과 의미의 층위가 덧쌓이며 암각화의 상징과 의미가 변화되었을 것이다.
바위그림의 제작 시기, 즉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림 그 자체만을 가지고 바위그림의 제작시기를 단적으로 제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포항 인비동 바위그림은 이단 병식 석검과 무경식 석촉이 묘사된 것이라면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에 속할 수 있으며 여수 오림동 고인돌 덮개돌, 대구 진천동 선돌, 밀양 살내 고인돌 묘역석의 바위그림 등은 송국리 문화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부여 송국리 1호 돌널무덤의 뚜껑돌과 보성 동촌리 고인돌 하부 뚜껑돌과 돌널 벽에서 확인된 알 구멍은 고고학적인 층위상으로도 매장 시기에 바위그림이 새겨진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또 고령 봉평리 바위그림의 경우에도 청동기 시대 문화층에 가려진 바위그림이 확인되어 고고학적인 층위상으로도 해당 바위그림이 청동기 시대에 속함을 보여준다. 고령 장기리에서는 여러 개의 동심원과 패 모양 암각이 하나의 암면(岩面)에 배치되어 있으면서 서로 중복되지 않는 점에서 양자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고령 양전리나 경주 석장동, 상신리 유적의 주변에서 지표 채집된 민무늬 토기와 관련된 유적이 있다. 이들 민무늬 토기는 대체로 초기 철기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바위그림이 이 유적에서 생활한 주민들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전체적인 바위그림의 주된 제작 시기를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까지 보아도 무리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