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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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張志淵, 1864년 11월 30일 ~ 1921년 10월 2일)은 대한제국의 애국 계몽 운동가 겸 언론인이었지만 친일 행적을 보인 사람이다. 본명은 장지윤(張志尹)이며 아호는 위암(韋庵)이다.[1]

생애

생애 초반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 향시 응제과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다. 이후 3~4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1894년 식년시 진사로 합격했으나, 이무렵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관직에 임명되지는 못하자,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낙향하여, 이후 후학 양성과 계몽 운동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부터 내부주사를 겸직하다가 1898년 10월에 의면했다.

언론, 독립운동

1898년 4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에는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같은 해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으나 수개월 후 그만두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흠흠신서'등을 간행했다. 1901년 봄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에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경장에 관한 주요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을사 조약 전후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윤치호,이달용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을 규탄한 <시일야방성대곡> 은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 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다. 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재팬크로니클 등의 언론이 이 명문을 인용했다. 한편, 장지연이 사장직에 있던 황성신문은 통감부의 압력에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 정간되었다.

1906년 1월에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장지연은 교육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아갔고,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등을 조직하여 친일단체 일진회와 정면 대립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생애 후반

1908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며 1년가량 머물렀고, 귀국하여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이 신문은 1910년 경술국치 체결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 복간되는 과정을 거쳤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게서 그에게 공직을 제의했지만 그는 사양하였다.

1918년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사설 실린것이 마지막글로 그 이후부터 장지연은 병으로 요양하던 중 1919년 4월 경남 양산을 유람했다.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했지만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A7%80%EC%97%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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