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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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1905년,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채호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7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 것은 이런 활발한 저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참고 문헌

  • 《단재 신채호 평전》, 김삼웅 저, 시대의창, 2005
  • 《단재신채호전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독립기념관, 2008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2001)
  • 안병직, 《신채호》 (한길사, 1980)
  • 신용하,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한길사, 1984)
  •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형설출판사, 1986)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B1%84%ED%98%B8
  1. 《단재신채호전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독립기념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