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와 몽골의 사례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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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제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한국 국민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기억해 왔다. 이는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는데, 남미와 유럽 등 외채 문제로 심각한 위기를 겪는 나라에서는 한국의 국채보상운동과 금모으기 운동이 국민운동의 모델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의 금융 위기, 아일랜드와 그리스 같은 유럽의 금융 위기, 2017년 초 몽골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몽골국립은행 통계, https://www.mongolbank.mn/eng/liststatistic.aspx

멕시코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1934~1940년 재임) 전 대통령은 1938년 멕시코에 진출해 있던 17개 외국계 석유회사들의 자산을 몰수하고 국영 석유회사 페멕스(PEMEX; Petróleos Mexicanos)를 세운 뒤 석유 생산에서 정제·유통에 이르는 모든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다. 박구병, 「멕시코의 석유 자원 국유화 조치와 외채 상환」, 『국채보상운동100주년기념자료집』,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2007.

멕시코 정부가 독립적인 주권 국가의 위신을 내세운 대가는 엄청난 외채 상환의 부담이었다. 멕시코는 외국계 석유회사들에게 4억6천8백만 페소(약 1억3천만 달러)를 보상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채 상환 부담이 크게 늘어 1938년 멕시코의 대외 공공 부채는 9억3천만 페소(약 3억 달러)에 이르렀다. 석유회사들과 상환 협상은 결렬되고 멕시코 정부는 그들에게 벌금과 해약금을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미국과 멕시코 정부, 미국과 영국 회사들과 협상 끝에, 10년 6개월 만에 멕시코 정부는 석유회사 수용 재산에 대한 보상 문제를 마무리했다.

멕시코인들은 노동자들에게 최저 생활임금조차 지불하지 않으려 하는 외국인들에게 자국의 자원이 헐값으로 넘겨졌었다는 데 분노했다. 한편 1938년 4월 12일에 수천 명의 여성들이 외국계 석유회사들에 대한 채무를 갚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모금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가정주부이던 여성들은 이 애국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주멕시코 미국 대사 대니얼스는 그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기록했다. 대니얼스는 그 광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 그 날 어떤 국가에서도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대통령 영부인 아말리아 솔로르사노 데 카르데나스가 앞장서고 그 뒤를 빈부노소의 구분 없이 마치 종교적 축제와 같은 희생 제의가 펼쳐졌다. 그들은 예물 반지, 팔찌, 귀걸이를 벗어 국가의 제단에 바쳤다. 이 멕시코의 여성들은 하루 종일 큰 그릇이 차고 넘치도록 바치고 또 바쳤다. 밤이 깊었을 때도 금은보화에서 닭과 옥수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헌납품을 내기 위해 군중은 여전히 기다렸다.

  • Josephus Daniels, Shirt-Sleeve Diplomat,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47, p.247.
  • 박구병, 앞의 글에서 재인용.

게다가 정부의 교육·문화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가톨릭 신자들도 기금 모금 대열에 적극 동참했다. 과달라하라의 대주교 호세 가리비 이 리베라(José Garibi y Rivera)는 부활절 기념 주간에 특별 메시지를 발표하고 기금 모집에 동참하는 것이 애국적 행위라고 강론하며 교회의 기부 활동을 승인했다. 대니얼스는 민간 차원의 모금이 수백만 페소의 목표액에 턱없이 못 미치는 10만 페소 정도에 머물렀다고 밝혔지만, 이런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1938년 8월 중순까지 220만 페소를 모았다는 학자의 주장도 있다.

  • Rippy, Merrill. Oil and the Mexican Revolution, E. J. Brill: Leiden, Netherlands, 1972.
  • 박구병, 앞의 글에서 재인용.

사실 액수와 상관없이 이런 활동은 멕시코인들을 단합시키는 데 기여하고 경제 영역에서 혁명의 성취와 경제적 주권의 확립을 도모한 카르데나스의 조치를 국가적 통합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멕시코는 불사조 같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 되었고, 카르데나스는 대중이 외국계 석유회사들을 국가의 적이라고 느끼도록 만들며 석유 수용 조치에 대한 찬성을 일종의 국가 종교로 만들었다.

몽골

한편 몽골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몽골 국민들 역시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현금 뿐 아니라 보석, 금붙이 등을 내놓고 있다. 더욱이 유목민에게 생명과도 같은 말까지 나랏빚 갚는 데 보태고 있다. 국민의 모금운동은 몽골 정부가 요청하였다는 설이 있었는데, 에르데네바트 자르갈톨가 몽골 총리는 국민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정부가 요청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정부로선 어떠한 시민 주도 운동도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해, 국민의 성금을 마다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피니언뉴스, 2017.2.19.

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20

국영 은행인 몽골개발은행(DBM)이 2012년 발행한 국채 5억8천만 달러가 2017년 9월 30일 현재 26억2천4백만 달러의 외채 부담으로 돌아와, 이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국가 부도 사태를 겪을 위기에 직면하였다. 몽골은 이미 1994~1996년 사이에 제1차 은행 위기를 겪었다. 당시 몽골의 초기 상업은행들 Mongolian Cooperative, Selenge 등이 파산했다. 2차 위기는 1997~1999년도에 Hotosh, ARD 등 총 10개 금융 기관의 파산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은행 시스템의 위기는 충격 요법 정책의 후유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은행의 지급 불능 상황을 야기한 주요 원인은 은행들의 부실 경영과 도덕적 해이 문제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 시스템 미발달, 즉 중앙은행의 감독 기능 미비 때문이었다.

  • Lkhagvadorj Dolgormaa, 「몽골 금융위기와 향후 경제정책 전망」,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몽골연구회 대외경제전문가풀 발표자료, 2016.2.16.

2017년 5월 24일 국제통화기금(IMF)이 몽골 정부에 4억3천4백만 달러의 장기 차관을 승인하였는데, 몽골에 민주 정권이 들어선 1990년 이래 무려 여섯 번째 구제금융 제공 결정이다.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한국과 일본도 30억 달러를 보탰고, 몽골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150억 위안(약 22억 달러) 규모의 스와프 협정을 연장했다.

http://www.hankookilbo.com/m/v/db7cdecfbdbb41ce99ba444f07e69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