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명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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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이름: 김지명 Ph.D.
  • 영문: Kim Ji-myung (Joanne Kim)
  • 전공: 인문정보학, 디지털인문학
  • 소속: 한국학중앙연구원
  • 학번: 20142651
  • 메일: heritagekorea21@gmail.com


기본사항
학력
주요경력

저술/번역

  • 가난한 자들을 위한 투쟁 (1978)크리스쳔아카데미
  • 숨겨진 차원 (1983) 정음사
  • 레닌그라드 데카메론 (1985) 열음사
  • 시사영어신조어 사전 (1987)(1990)열음사
  • 올림픽학술회의논문집(국문, 영문)(1989) 올림픽조직위원회
  • 영어속담사전 (1989/1994/2006) 지식산업사
  • 조선왕릉, 하회양동마을 UNESCO등재문서 (2004, 2006) 문화재청

생애

부산에서 출생. 4세이후 서울에서 살았다. 성장기는 우리나라의 압축 경제성장과 정치변혁의 시기였고 성인기는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급변하는 시기여서 역설적으로 기회의 시대였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자기 몫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성장기

부산의 외가와 경남 양산군의 친가에서 전형적인 도시 생활과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농업 기반의 유교문화를 체험했다. 어른이 된 후 4년간의 유럽 생활은 넓은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학교생활

충정유치원, 수송국민학교, 경기여고,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등 여러 학교를 두루 다녔다. 뉴욕 유엔본부에서 실시하는 "세계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오전에는 유엔의 각종 회의를 체험하고 오후에는 유엔의 신문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것도 국제관계에 대한 시각을 넓혀 주었다. 2000년 정부의 "디자인 원년" 선포와 함께 실시된 국내 경제계 지도자를 위한 IDAS(디자인대학원) CEO 과정도 재미있었다. 90분 강의하러 외국서 비행기 타고 왔던 유명 연사들의 강의 내용이 인상깊었다.

사회생활

Korea Times 신문기자 동시통역사 번역가 칼럼기고가 등 항상 일을 하며 바쁘게 지냈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석사공부를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느 교수님은 그 당시 서울대는 학사관리가 "헐렁했다" 고 했다. 옳은 말이다. 아마도 그랬으니까 신문기자를 하면서 석사학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외대 통역대학원 1기로 졸업후 동시통역사 활동을 했다. 일본 통역사들을 모델로 삼아 통역계약서를 만들고, 수당을 정하며, 해외출장조건 등을 작성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도 많지 않았지만 통역사가 몇 안 되다 보니 봄인가... 하다 보면 눈오는 겨울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들과 고건총리등과 APEC 정상회담, ASEM 회의에 출장 다녔다. 대통령들 취임식과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의 장례식 동시통역을 했다. 그러나 가장 여유로운 시간은 1980년대 말 독일에서 3년 8개월 지낸 기간이다. 내 생애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었는데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책을 2권 썼다.

기업활동

신문기자로 또 동시통역사로 여러 나라의 좋은 장면을 두루 많이 보았으니 그 안목으로 우리나라의 국제행사를 제대로 기획해 보라는 관광공사의 권유로 컨퍼런스와 컨벤션을 기획하고 주관하는 회사를 만들어 10년간 운영했다. 나보다 유능하고 성격좋은 직원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아이디어만 내고 일은 그들이 다 해 냈다. 지금도 문화계에서는 당시 우리 회사가 진행했던 "세계박물관대회 (ICOM 2004)" "세계도서관대회(IFLA 2006)" "세계여성학대회" 같은 역사적 문화행사를 가장 성공적인 행사로 회고한다. 당시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보람을 느낀다.

다시 학교로

2014년에 다시 [1]한국학중앙연구원 학생이 되었다. 과거에 4년동안 외대 신문방송학과에서 강의도 했었지만 나는 역시 학생노릇이 더 좋다. 사실은 영어신문기자와 동시통역사, 컨벤션기획가 역할을 하면서 한반도 밖의 넓은 세상에서 한국은 너무도 안 알려지거나 잘 못 알려진 나라여서 답답했다. 대원군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끼리 나라 안에서만 서로 싸우고 깍아 내리고 상처를 준다. 역사 인물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다보니 역사에 변변하게 존경받고 대접받는 인물이 없다. 신문에 칼럼도 쓰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 역사와 삶을 길고 넓게 보고 시각을 넓혀 세계안에서 한국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자고 외쳐 봐도 세상은 별로 반응이 없었다. 세계의 지식세계에 이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어떻게 해야 할까? (1)공부를 제대로 좀 하고 (2)학위를 따서 자격을 갖추려고 입학 하였다.

개인생활

남들이 갖고 있는것은 다 있다. 남편,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집, 시골집, 자전거, 자동차, 게다가 손녀까지 둘 이나 있다. 꽃, 나무, 시골 좋아하는 식구들이 옛날 옛날에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대신 적은 돈으로 시골에 싼 농가를 사 두었다가 가장이 은퇴한 후에 집을 지었다. 이 집은 평생동안 우리 가족과 주위 친구들의 "꿈"이 되었다. "앞으로 지을 집"에 대해 수많은 계획을 세우며 다 들 즐거워 했었다. 나중에 집을 짓고서는 매년 몇 차례 마음껏 노는 행사를 하면서 함께 나이들어 간다.

그래서 요즘 사도삼촌 (四都三村) 생활이다. 시골집에서 금토일 3박이다. 다만 어려운 점은 주인노릇 뿐 아니라 머슴노릇까지 해야 하는 집주인은 사실 일년 내내 힘든다. 누가 그랬던가? 애인과 별장은 없으면 부럽고 있으면 골치 아프다고. 나는 잡초뽑기 담당, 먹걸이 수확 담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