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스토리 디지털 큐레이션 모델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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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대한제국기 데이터의 디지털 큐레이션 모델

1. 지식인들 사회에서는 이미 18세기부터 내려오는 국제적 교류관계와 유대감 형성. 아시아지식인연대

18세기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이 지적인 대화를 “문예공화국”이라 논한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 藤塚隣)의 자료는 한중간의 지식인 연대를 잘 보여준다. 1880년 무렵부터 한국사회에 일어난 근본적 변화는 신지식에 대한 갈구 현상이다. 개화(開化)사상은 1870년대 발생하여 구한말 한국 사회를 지배하였다. 개화사상과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식의 변화, 외부로부터 대량으로 유입된 실용적 지식과 국제 정세에 대한 서적, 외국 지식인들과의 만남과 교류 등 집단으로서 한국인의 인식에 꾸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의 수신사들은 “아시아 삼국이 연대하여 서양으로부터 모욕을 받지 않도록 하자“는 흥아회(興亞會)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일본의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2. 서포는 출판문화 운동을 중심으로 애국계몽 운동을 이끈 중심지였다. 서포와 출판문화운동

애국적 계몽, 자강 운동을 펼친 지도자들은 교육계몽운동, 출판문화운동, 애국독립운동에 중복적으로 투신했다. 개화기 서점은 주로 민족의식이 강한 선각자들이 주도하여 설립운영 하였다. 외국의 서적을 수입, 판매 하거나 기획한 책을 출판하기도 하고 지식인이 모여 세미나에 해당하는 문회(文會)를 하기도 했다. 광문사에는 문회가 있었는데 1907년 1월 30일 문회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여 일본의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중국의 광학회(光學會)와 연락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교육을 확장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통하여 신지식을 수용 했던 것은 이미 같은 한자 문화권에 구축되어 있던 서적 유통망과 지식인들 간의 인적 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3. 국채보상운동기 기록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만드는 작업은 새로운 인물의 발굴 과정이기도 하였다. 새인물발견


역사의 무대에서 조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대에 큰일을 소리 없이 추진한 인물들이 많다. 지식인으로서 집필과 저술, 번역, 출판, 학교설립, 교육, 항일 단체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중복적으로 여러 활동을 동시에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1910년 일본의 의해 국권침탈이 이루어지자, 10월 11일자의 <경남일보>는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하였다. 그로인해 <경남일보>는 10일간 발행정지 되었다. 그 많은 전국의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국내외에서 자결하였는데 이 비극적 드라마에 대한 네러티브가 있었던가?


4. 나라는 주권 없는 식민지로 전락했으나 국민 개인들은 전통적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민권과 자유를 느끼면서 신문화에 탐닉한 문예 부흥기였다. 신문화

신분제의 폐지와 근대 신문화의 유입은 일반 백성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되고 신지식을 흡수하여 개인으로서 민권과 자존감에대한 의식이 깨는 시기였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한글로 된 인쇄본 책을 서포에서 사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문화혁명과도 같은 변화였다. 근대 사회화 하면서 신문화의 물결은 일종의 문화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형식의 시와 소설, 간행물, 노래, 대중음악, 서구적 춤과 연극 등의 공연물이 일본으로부터 물밀듯이 들어왔다. 기독교 단체를 통해 미국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회도 늘었고 국민들은 높은 관심을 보였다.


5. 한국 여성들의 적극적 기질을 나타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다. 여성의연


배움이 없어 깜깜한 밤길에 등불 없이 걷는 맹인과 같다고 하소연하며 여자 교육 학교를 세워 달라고 먼저 요구한 것이 여성들이었다. 맨 처음에 거금을 투척한 앵무는 정통 역사 인물 정보에는 빠져있다. 왜? 당시 기생은 인격체로 대접받는 신분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에 기록에 나타난 인원이 18만 명이상, 여성명단 약 5천명이 있으며 의연자들의 직업, 가족, 거주 지역, 금액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6. 이토히로부미는 온 힘을 다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저지시켰다. 외교분쟁


엄청난 항일운동의 잠재력을 보았고 이토 통감은 운동 저지를 위해 매일 직접 감독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초기 성공은 국민들의 폭발적 호응이 있어서 가능했는데 그것은 언론기관이 모금운동의 진행 상황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서 운동의 신뢰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의연자 개개인 정보의 정확한 확인과 엄격한 기록, 그 명단과 금액, 사연의 신문 보도 등, 모금운동의 핵심 요소인 신뢰 확보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신뢰를 무너뜨림으로서 이토 통감은 국채보상운동을 불과 반년 정도에 좌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모금 기관이다 담당자가 기금을 횡령하였다는 의구심은 동서고금의 모금운동의 최악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