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연구소

논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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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는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설치한 한글연구기관이다.


내용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崐)의 청의로 각의를 거쳐 그해 7월 8일에 설치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정음청(正音廳) 설치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기관이라 할 수 있다.

설립동기는 19세기 말엽부터 문자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별적인 노력은 있었으나, 공동연구에 의한 통일된 문자체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데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로서는 1905년 7월 지석영(池錫永)이 소청한 <신정국문 新訂國文>을 정부가 재가하여 공포한 결과, 그 내용에 담긴 결점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1906년 5월에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 國文一定意見>을 학부에 제출하여 우리 나라 문자체계의 통일을 역설한 것을 들 수가 있다.

<국문연구소규칙> 제1조에 “본소에서는 국문의 원리 및 연혁과 현재의 행용(行用) 및 장래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조직은 개설 당시 위원장에는 학부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 위원으로 학부 편집국장 장헌식(張憲植),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 교장 이능화, 내부 서기관 권보상(權輔相), 그리고 현은(玄은)·주시경 및 학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우에무라(上村正己)가 임명되었다. 한달 뒤인 8월 19일 학부 편집국장이 경질되면서 장헌식이 해임되고, 어윤적(魚允迪)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9월 16일에 첫 회의를 열어 <국문연구소규칙>의 작성과 위원의 보선을 논의하여 9월 23일자로 이종일(李鍾一)·이억(李億)·윤돈구(尹敦求)·송기용(宋綺用)·유필근(柳苾根) 등 5명이 새로 임명되었다.

1908년 1월에는 지석영이, 6월에는 이민응(李敏應)이 위원으로 추가 선임되었고, 8월과 10월에는 이억·현은·이종일·유필근이 해임되었다.

활동은 1907년 9월 16일에 제1회 회의를 개최한 이래 23회의 회의를 열었는데, 그 최종 회의는 1909년 12월 27일 에 있었다. 그동안 위원장은 10회에 걸쳐 모두 14개항의 문제를 제출하였고, 이에 대한 토론과 의결을 거쳐 1909년 12월 28일자로 최종적인 보고서를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였다.

보고서는 <국문연구의정안 國文硏究議定案>과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8위원의 연구안으로 꾸며졌는데, 정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문연구의정안>은 세상에 공포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국문연구의정안>은 국문연구소 위원들의 협동적 노력의 결정으로서, 개화기에 있어서의 국문연구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국문연구의정안>은 앞서 토의에 붙였던 14개항의 문제를 10개항으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① 국문의 연원과 자체(字體) 및 발음의 연혁, ② 초성 중 ,ㆆ, △, ◇, ㅱ, ㅸ, ㆄ, ㅹ 여덟 자의 부용(復用) 당부(當否).

③ 초성의 ㄲ, ㄸ, ㅃ, ㅆ, ㅉ, ㆅ 여섯 자 병서(竝書)의 서법일정(書法一定), ④ 중성 중 ‘·’자 폐지와 ‘=’자 창제의 당부, ⑤ 종성의 ㄷ, ㅅ 두 자의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여섯 자도 종성에 통용 당부.

⑥ 자모(字母)의 7음과 청탁(淸濁)의 구별 여하, ⑦ 사성표(四聲票)의 용부(用否) 및 국어음의 고저법, ⑧ 자모의 음독일정(音讀一定), ⑨ 자순(字順)과 행순(行順)의 일정, ⑩ 철자법 등이었다.

<국문연구의정안>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문자체계와 표기법의 통일안이라고 할 수 있다. ‘·’자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이 의정안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체계와 맞춤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국문연구소의 문제토의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연구안 등의 등사물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육당문고(六堂文庫)에 보관되어 있고, 그 최종보고서의 모든 서류는 일본 동경대학 중앙도서관의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 당시 간행된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등의 보도도 참고가 된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6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