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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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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무령왕.png
 
|한글=무령왕
 
|한자=武寧王
 
|영어=
 
|생몰년=462년 7월 14일 혹은 461년 6월 25일~523년 6월 7일
 
|이칭=부여융(扶餘隆)
 
|배우자=왕대비(王大妃) 대부인(大夫人)
 
|자녀=순타태자(純陀太子), 성왕(聖王), 사아군(斯我君)
 
|부(父)=곤지(昆支)
 
|모(母)=개로왕의 부인
 
}}
 
  
 
==내용==
 
==내용==

2024년 10월 5일 (토) 11:13 판


내용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의 이름은 사마(斯麻, 斯摩) 또는 융(隆)이라 하였다. 키가 8척이나 되고 얼굴은 그림 같았으며 성정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많이 따랐다. 무령왕은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동성왕의 피살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고 지방 통치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적 지위를 다시 회복해야만 했다. 실제로 무령왕은 이를 위해 몇 가지 주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로써 동성왕의 피살에 따른 혼란이 종식되고, 동성왕 대에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진 귀족 세력들을 일정하게 억제하게 됨으로써 왕권을 새로이 안정시킬 수 있었다. 무령왕이 취한 두 번째 조치는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 무령왕은 즉위하던 해 11월에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한 것을 필두로 502년(무령왕 2)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였고, 503년 말갈이 공격해오자 이를 손쉽게 물리쳤다. 507년 고구려의 고노(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침입해오자 역시 물리쳤으며, 512년에도 쳐들어온 고구려 군대를 기묘한 계책으로 대파하였다. 이렇게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도 하고, 반격해 오는 고구려와 말갈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키는 등 고구려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백제의 국제적인 지위도 격상되었다. 무령왕은 양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강화하여 512년과 521년에 각각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521년에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를 받은 것은 격상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무령왕은 격상된 국제적 지위를 바탕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하였다.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라는 전에 없었던 혼란기를 겪으면서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느슨해진 지방 통제력을 강화시킨 것이 담로제(擔魯制)였다. 담로란 군현(郡縣)과 같은 행정 단위로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곳인데, 『양서(梁書)』에는 백제에 22개의 담로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에서 22담로제가 실시된 것은 대체로 무령왕 때로 보고 있는데, 이는 무령왕 때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느슨해진 것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에서 나온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령왕은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압력에 의해 웅진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무령왕은 이러한 영토 축소를 극복하기 위해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였다. 그 결과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기문(己汶), 대사(帶沙)를 차지하였다. 한강 유역 상실에 따르는 인적(人的)·물적(物的)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령왕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도 전력을 기울였다. 506년(무령왕 6)에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으며, 510년에는 제방을 튼튼하게 쌓고 놀고먹는 자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수리 시설을 완비하고,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들이 다시 농사지울 수 있게 함으로써 피폐해진 농가 경제를 회복하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무령왕은 웅진 천도에 따른 혼란을 종식시키고,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농민경제를 회복시키고, 고구려와의 경쟁에서도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등 백제 중흥의 길을 연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523년 5월 7일 62세의 나이로 서거하였으며, 525년 8월 12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에 안장되었다.[1]

참고문헌

Web Resource

  1. "무령왕", 『디지털공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