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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일) 23:23 판
목차
T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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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1 | 정회당, 돈암서원이 되기까지의 운영 과정 | 정회당은 1577년 김계휘가 관직이 삭탈된 후 천호산 고운사(양산리)에 내려와 전각을 빌려 당호를 정회당이라 짓고 서재로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정회당은 광산김씨 및 연산현 사족 집안 자제들의 강학 장소이자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서재로 기능하였으며 돈암서원 건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정회당의 운영 내용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문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정회당 인근에 있었던 느티나무와 관련된 구전 등이 전승되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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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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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2 | 돈암서원의 건물과 유적 | 돈암서원은 하마비와 홍살문을 지나, 전면에서부터 산앙루,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가 중심 축선상에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응도당, 동서재, 장판각, 경회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비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양성당의 서편에는 장판각 외에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가 강학했던 공간인 정회당이 있다. 원정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적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가 썼다. 돈암서원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돈암서원에 있는 건축물인 응도당은 보물로, 유경사(現 숭례사)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묘정비(원정비)는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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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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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3 | 돈암서원의 배향인물과 소장자료 |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1634년(인조 12) 김장생 배향 이후 1658년(효종 9)에 김집, 1688년(숙종 14)에 송준길, 1695년(숙종 21) 송시열을 추가 배향하였다. 돈암서원 장판각에는 이들과 관계된 문헌과 목판이 소장되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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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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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4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돈암서원 | 돈암서원은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철폐되지 않고 이어진 서원으로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때 함께 등재된 서원으로는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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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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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5 | 노강서원의 역사와 배향인물 | 노강서원은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1675년(숙종 1) 윤황 배향 이후 1682년(숙종 8)에 윤문거, 1723년(경종 3)에 윤선거와 윤증을 추가 배향하였다. 매번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628년(숙종 8)에 '노강(魯岡)'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201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노강서원 강당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보물로 승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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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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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6 | 노강서원의 건물과 유적 | 노강서원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을 중심으로 북편에 강당이 전면을 향해 크게 서있고, 그 앞 좌·우측에 강학공간인 동재인 송덕재와, 서재인 경송재가 대칭으로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강당 뒤편에는 높은 단을 조성하여 제향공간인 내삼문과 사당인 '숭의사'를 배치하였고, 사당 주위에는 담을 둘러 엄숙함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내삼문은 일반적인 1동으로 하지 않고 3동으로 하여 예적질서에 따라 신과 사람의 출입동선을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다. 노강서원의 강당은 충남지역에서 대표적으로 큰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여덟 팔八자 모양의 박공면 풍판 아래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덧지붕인 영(榮)을 눈썹처럼 달았다. 이는 풍우로부터 훼손을 방지하고 어색하게 높은 건물의 외관을 시각적으로 안정되게 한다. 노강서원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노강서원의 강당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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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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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7 |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대표적 문중서당, 종학당과 기록유산 | 종학당은 1643년 윤순거가 파평윤씨 문중의 자녀 교육을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이곳에서는 종중의 자제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제들까지 합숙하며 공부하였으며 40명이 넘는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었다. 종학당의 운영과 교육 내용 등을 보여주는 기록유산으로는 『종학실부』, 『월강록』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종학당에 걸려 있던 편액에는 『초학획일지도』와 『위학지방도』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종학당 학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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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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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8 | 정회당, 돈암서원이 되기까지의 운영 과정 | 명재고택은 윤증이 지었다고 전해진다.(or 명재고택은 1709년 제자들이 윤증을 위해 지었고, 윤증이 잠시 기거하였다고 전해진다.) 고택 앞쪽에는 넓은 마당과 커다란 인공 연못이 있는데, 솟을대문이 없어 탁 트인 개방감이 느껴진다. 높은 기단 위에 사랑채, 안채, 행랑채가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동쪽 뒤편에 사당이 있다. 사당 앞에서부터 사랑채 옆까지 이르는 넓은 대지에는 수백개의 장독이 놓여있는데, 이 장독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300년 넘은 장(간장, 된장)이 저장되어 있다. 안채를 제외하고는 높은 담이 없고 연못과 커다란 나무 등 자연요소가 집의 담장 역할을 하고 있다.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송시열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계기로 송시열과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이후 윤증이 송시열을 배반하고 헐뜯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치열한 당쟁에서 소론의 영수로서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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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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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09 | 유학자 윤증의 초상 | 조선시대의 학자 윤증의 초상은 1711년 변량이 처음 그렸으며, 이후 1744년에 장경주, 1788년에 이명기, 1885년에 이한철이 기존의 초상을 모사하면서 여러 점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윤증 초상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데에 참여한 당대 최고의 화사들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윤증의 초상 중 1744년과 1788년에 그려진 5점과 초상 제작 과정을 담은 『영당기적(影堂紀蹟)』이 2006년 ‘윤증 초상 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당기적』에는 1711년부터 1885년까지 윤증 초상의 제작 일정,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 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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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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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0 | 충청도 최초의 사액 서원, 충현서원 | 충현서원은 조선시대 학자인 서기가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기가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한 연정(박약재)에서 비롯되었으며, 1581년 공암서원(孔巖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하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공암서원에는 중국의 주자를 중앙에 모시고, 공주의 향현(鄕賢)인 석탄 이존오, 한재 이목, 동주 성제원을 제향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 중수하였고, 1624년 충청도 지역에서는 최초로 사액서원이 되어 공암서원에서 '충현서원(忠賢)'이 되었다. 이후 충현서원은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의 위패를 모시고 지방 유생들을 교육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공주 지역 사림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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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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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1 | 충현서원의 건물과 유적 | 충현서원은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5년에 다시 지었다. 현재 서원에는 홍살문, 하마비, 강당인 박약당, 내삼문, 사당이 있고, 충현서원의 내력과 주자의 영정을 새로 봉안하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한 사적비와 충현서원에 송시열이 배향되는 과정을 기록한 우암 손선생 추향기비가 있다. 사적비의 비문은 최규서가 짓고 조상우가 썼으며, 최규서의 문집인 『간재집』에 실려 있다. 우암 손선생 추향기비의 비문은 김진상이 썼다. 충현서원은 1984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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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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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012 | 충현서원의 배향인물 | 충현서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공암서원은 건립 당시 주자를 중앙에 모시고 공주의 향현인 이존오, 이목, 성제원을 제향하였다. 사액서원이 된 이후에는 서기를 별사(別祀)하기 시작했다. 이후 충현서원은 당시 공주 지역 사림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지역의 명현을 제향하게 되었다. 효종조에 중봉 조헌, 1674년 사계 김장생, 1686년 동춘당 송준길, 1713년 우암 송시열이 차례로 제향되었다. 한편 둔옹 박희성, 탄옹 권시, 초려 이유태, 인재 성희와 같은 공주를 가향으로 하고 충현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는 등의 공주와 충현서원과 밀접한 인물들의 제향이 시도되기도 했었으나 끝내 이뤄지지는 못했다. 이후 충현서원은 1925년 사우를 복원하면서 주자영정을 북벽에 봉안하고 그동안 별사되었던 서기도 함께 제향하면서 오늘과 같은 모습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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