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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승언리 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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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27일 (월) 10:2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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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승언리상여
태안 승언리 상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태안승언리상여
한자 泰安承彦里喪輿
주소 충청남도 태안군 그네들길 81-28 (안면읍)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5호
지정일 1990년 5월 24일
분류 유물/기타종교조각/민간신앙조각/목조
수량/면적 1개
웹사이트 태안 승언리 상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시대 말 왕실에서 썼던 상여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상여에 실어 무덤까지 날랐다.

이 상여는 고종 임금의 맏아들인 완화군 이선의 장례 때에 썼던 것이다. 이선은 고종의 사랑을 받던 왕자였는데 민비의 아들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고 9살이 되어서 궁궐을 나와 살았다. 왕자는 13살이 된 1880년(고종 17)에 열병을 앓다 죽고 말았다. 어린 이선 왕자의 스승이었던 김병년은 자신이 살던 안면도 승언리의 주민들을 불러 왕자의 장례를 치르고 장례 때 쓴 상여를 마을에 주었다고 한다.

태안 승언리 상여는 가마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상여의 앞과 뒤에 청색과 황색의 용이 새겨 있다. 상여의 맨 꼭대기에는 말을 탄 저승사자 모양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특이하고 섬세한 데다 색칠도 화려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으나 현재 도난당한 상태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상여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맏아들인 완화군 이선(1868-1880)의 장례 때에 썼던 것이다.

이선은 고종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으나,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종의 아버지이자 당시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1820-1898)이 이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지만, 왕비의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9살이 되어서는 궁궐을 나와 살았고, 열병을 앓다가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이선의 스승이었던 김병년(1855-1927)은 자신이 살던 안면도 승언리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이 상여를 만들고 왕자의 장례를 치렀다. 김병년은 자신이 죽으면 이 상여로 장사 지내 달라고 유언을 하였고, 그의 장례에 사용된 이래 계속 이 마을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여는 가마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앞과 뒤에는 봉황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는 등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화려하다. 상여의 크기는 길이 2.2m, 너비 1m, 높이 1.5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