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승언리 상여
태안승언리상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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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태안승언리상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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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泰安承彦里喪輿 |
주소 | 충청남도 태안군 그네들길 81-28 (안면읍) |
지정(등록) 종목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5호 |
지정(등록)일 | 1990년 5월 24일 |
분류 | 유물/기타종교조각/민간신앙조각/목조 |
수량/면적 | 1개 |
웹사이트 | 태안 승언리 상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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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태안 승언리 상여는 조선 시대 말 왕실에서 썼던 상여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상여에 실어 무덤까지 날랐다.
이 상여는 고종 임금의 맏아들인 완화군 이선의 장례 때 썼던 것이다. 이선은 고종의 사랑을 받던 왕자였는데 민비의 아들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고 9살이 되어서 궁궐을 나와 살았다. 왕자는 13살이 된 1880년(고종 17)에 열병을 앓다 죽고 말았다. 어린 이선 왕자의 스승이었던 김병년은 자신이 살던 안면도 승언리의 주민들을 불러 왕자의 장례를 치르고 장례 때 쓴 상여를 마을에 주었다고 한다.
태안 승언리 상여는 가마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상여의 앞뒤에 청색과 황색의 용이 새겨져 있다. 상여의 맨 꼭대기에는 말을 탄 저승사자 모양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모습이 특이하고 섬세한 데다 색칠도 화려해서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으나 현재 도난당한 상태이다.
영문
Bier in Seungeon-ri, Taean
This bier was used in the funeral of Yi Seon (1868-1880, Prince Wanhwagun), the eldest son of King Gojong (1852-1919, r. 1863-1907)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lthough Yi Seon was born to a royal concubine, King Gojong loved him dearly. King Gojong's father Heungseon Daewongun (1820-1898), who was serving as prince regent for the teenage king, wished to make Yi Seon the heir to the throne, but failed due to queen consort’s strong opposition. When Yi Seon turned nine years old, he was forced to live outside of the palace, and died of a fever at a young age.
Yi Seon’s teacher, Kim Byeong-nyeon (1855-1927) gathered funds and paid for the construction of this bier and the prince’s funeral with the help of the people of his hometown of Seungeon-ri on Anmyeondo Island. It was Kim Byeong-nyeon’s last wish that the same bier was used in his own funeral, and it has been kept in the village since.
This bier in its construction resembles a palanquin, and it is elaborately decorated with colorful ornaments, such as carvings of two phoenixes in the back and front. The bier measures 2.2 m in length, 1 m in width, and 1.5 m in height.
영문 해설 내용
이 상여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맏아들인 완화군 이선(1868-1880)의 장례 때에 썼던 것이다.
이선은 고종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으나,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종의 아버지이자 당시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1820-1898)이 이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지만, 왕비의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9살이 되어서는 궁궐을 나와 살았고, 열병을 앓다가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이선의 스승이었던 김병년(1855-1927)은 자신이 살던 안면도 승언리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이 상여를 만들고 왕자의 장례를 치렀다. 김병년은 자신이 죽으면 이 상여로 장사 지내 달라고 유언을 하였고, 그의 장례에 사용된 이래 계속 이 마을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여는 가마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앞과 뒤에는 봉황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는 등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화려하다. 상여의 크기는 길이 2.2m, 너비 1m, 높이 1.5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