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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진해 제포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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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진해 제포진성
창원 진해 제포진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원 진해 제포진성
한자 昌原 鎭海 薺浦鎭城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830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
지정일 1997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지
수량/면적 8,916㎡
웹사이트 창원 진해 제포진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성은 본래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왜구(倭寇)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 쌓은 것으로, 조선 성종(成宗)때 경상우도의 해군사령부[慶尙道右水營]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제포진성(薺浦鎭城) 1436년(세종 18년)에 제포를 개항(開港)한 후 왜인(倭人)의 불법 이주(移住)를 막기 위하여, 1437년에 합포(合浦,지금의 마산)에 있던 해군기지[水軍僉節制使營, 절제사는 종3품 관직]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쌓았다고 한다. 이후 1485년(성종 16년)에 다시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성은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돌로 불규칙하게 쌓았다. 원래의 성벽은 둘레 1,377m, 높이 3~5m, 폭 4.5m 정도로 큰 규모였으나, 지금은 해안 가까이에 100m 정도만 원형대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파괴되었다. 성의 구조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또 다른 성[曲城]이 있으며,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방어용 도랑[垓字]를 둘렀다. 현재 성 안쪽은 경작지로 변해 있어 성 내부의 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길이 없다.

수정 국문

초고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고려 공양왕 2년(1390)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을 처음 설치하였고, 조선 성종 때 경상도 우수영을 설치한 곳이다.

『성종실록』 17년 10월 29일 기록을 보면 “이 달에 경상도 제포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3척이고, 둘레가 4,316척 3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해 제포진성은 축성 당시 4,313척[측정 결과 1,377m]으로, 웅천 읍성[3,514척] 보다 1.23배가량 큰 석성(石城)이었다. 다만 지금은 성체를 볼 수 없으며, 동문지와 해자, 남쪽 축대와 성벽 일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성은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돌로 불규칙하게 쌓았다. 원래의 성벽은 둘레 1,377m, 높이 3~5m, 폭 4.5m 정도로 큰 규모였으나, 지금은 해안 가까이에 100m 정도만 원형대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파괴되었다. 성의 구조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또 다른 성[曲城]이 있으며,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기 위해 해자(垓字)를 둘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의 『지방지도』 경상도 부분의 「제포진 지도」에 의하면 진해 제포진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하여 내아·이청·문루·신당·사령청·포수청·화포청·사공청·장교청·창고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웅천현 읍지』에 의하면 성내에 우물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성외 시설로는 수군의 무기고 역할을 했던 어변정(禦邊亭)이 있었으며 『웅천현 읍지』에 따르면 웅천현 읍성에서 4리 떨어진 제포 해변에 있었다.

1차 수정

제포진성은 조선시대 수군이 해상방어를 위해 축조한 성이다.

제포는 태종 7년(1407) 이후 왜와 류큐국의 사신과 무역상이 왕래하던 개항장이었으며, 주로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왜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왜구의 침입을 막고 왜관을 통제하기 위해 오랜기간 수군이 선상에서 주둔하고 있었으며, 수군들이 머물 수 있는 병영과 군사 물품 등을 보관할 창고를 마련하기 위해 성종 17년(1486)부터 진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으로 제포가 함락된 이후에는 인근의 웅천읍성으로 치소를 옮겼고, 제포는 제포진성으로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었다.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돌로 불규칙하게 쌓았다. 원래의 성벽은 둘레 1,377m, 높이 2m, 폭 4.5m 정도로 큰 규모였으나, 지금은 해안 가까이에 100m 정도만 원형대로 남아있다. 동쪽, 서쪽, 북쪽에는 옹성형의 문지가 있고, 성벽 곳곳에 곡성을 두었으며, 성벽 바깥 쪽에는 폭 5~9m, 깊이 약 5m의 해자를 둘렀다.

제포진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하여 여러 관아 건물과 군사시설이 있었고, 우물도 2개 있던 것으로 전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제포진성의 역사성 보완 (고려말인 공양왕 2년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뺀 이유는? 기존내용에서 새롭게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면 역사적 변천과정 설명차원에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문맥은 다시 정리) -> 제포진성은 고려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수군만호진이 있던 곳에 조선시대에 다시 수군의 해상방어를 위해 축조한 성이다.
    • 주로 일본과의 교역이… → 일본과의 교역이…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제포는 태종 7년(1407) 이후 왜와 류큐국의 사신과 무역상이 왕래하던 개항장이었으며, 주로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왜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 류큐국의 사신과 무역상이 왕래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지나치며, ‘부산포, 염포와 함께 일본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락했던 포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 왜구의 침입을 막고 왜관을 통제하기 위해 오랜기간 수군이 선상에서 주둔하고 있었으며, 수군들이 머물 수 있는 병영과 군사 물품 등을 보관할 창고를 마련하기 위해 성종 17년(1486)부터 진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 제포에는 세종 이전에 만호영(萬戶營)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세종실록지리지) ‘선상 주둔’이나 ‘창고를 마련하기 위해’ 등의 표현은 적절치 않다. ‘제포에 주둔하는 수군의 방어를 강화하고자’ 정도의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으로 제포가 함락된 이후에는 인근의 웅천읍성으로 치소를 옮겼고, 제포는 제포진성으로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었다. → 제포진이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으므로 ‘웅천읍성으로 치소를 옮겼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삼포왜란을 진압하고 일본인의 왕래를 금지한 뒤 본래 독립적인 행정단위였던 웅천과 제포의 위상을 상하관계로 조정한 사실을 이렇게 이해한 듯하다. 중종은 첨절제사영이었던 제포를 만호진으로 낮추고, 웅천현을 도호부로 승격하여 제포를 웅천도후부에 소속시켰다(중종실록 12권, 중종 5년 8월 4일).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내용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 성벽 곳곳에 곡성을 두었으며 → 의미가 애매한 ‘곡성(曲城)’ 보다 ‘성벽 곳곳에 돌출하여 치성(雉城)을’ 정도의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류큐국’에 괄호로 한자를 병기하고 간단한 설명을 넣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 ‘왜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는 ‘왜관이 설치되었다’로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8번째줄 맨 앞에 ‘제포진성은’을 넣어 ‘제포진성은 산정상에서 능선을 따라…’로 수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문맥요소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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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