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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I지구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7호분은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주인공은 당시 창녕 지역의 최고 지배자였으며, 주변을 둘러싼 중·소형 무덤들은 비화가야 지배층의 서열/hierarchy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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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과 2011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원형 봉분의 중심에서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확인되었다. 봉분은 직경이 31m이며, 돌덧널은 길이 9m, 너비 1~1.6m, 높이 1.8m로 다른 지역에 있는 가야 무덤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무덤의 공간을 나누고 흙을 쌓는 과정에 당시 최고의 토목기술이 사용되었으며, 무덤을 쌓는 다양한 의례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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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 청동뿔잔*, 말안장, 장신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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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7일 (화) 02:08 판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교동 I지구 7호분
Goto.png 종합안내판: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해설문

국문

교동 I지구 7호분은 교동 I지구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무덤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대표하는 대형 무덤으로 1918년과 2011년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7호분 주위로 중·소형 무덤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비화가야 지배층의 계층분화를 보여주는 흔적으로 보인다.

7호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원형 봉분으로 그 중심에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을 두었다. 봉분은 직경이 31m이며, 돌덧널은 길이 9m, 너비 1~1.6m, 높이 1.8m로 가야 무덤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편이다. 무덤의 공간을 나누고 흙을 쌓는 과정에 당시 최고의 토목기술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무덤을 쌓는 다양한 의례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무덤의 규모를 비롯하여 금동관(金銅冠), 청동뿔잔(靑銅角杯), 말안장(鞍橋), 장신구 등 다양하고 많은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무덤 주인공은 당시 창녕의 최고 지배자였음을 알 수 있다.


  • 돌로 네 벽을 쌓아 덧널을 만들고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다음 천장돌을 덮는 무덤 양식.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교동 I지구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7호분은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주인공은 당시 창녕 지역의 최고 지배자였으며, 주변을 둘러싼 중·소형 무덤들은 비화가야 지배층의 서열/hierarchy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보인다.

1918년과 2011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원형 봉분의 중심에서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확인되었다. 봉분은 직경이 31m이며, 돌덧널은 길이 9m, 너비 1~1.6m, 높이 1.8m로 다른 지역에 있는 가야 무덤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무덤의 공간을 나누고 흙을 쌓는 과정에 당시 최고의 토목기술이 사용되었으며, 무덤을 쌓는 다양한 의례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 청동뿔잔*, 말안장, 장신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