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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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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한자 正祖 御製 蔡濟恭 誄文碑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3-4번지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지정일 1978년 11월 10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는 조선 후기 정조가 명재상 채제공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히 지어 보낸 뇌문을 새긴 석비이다. 뇌문은 죽은 이의 명복을 신에게 비는 글로 제문의 일종이다.

채제공은 조선 후기 영조, 정조 대의 문신이자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23세 때인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예문관* 사관과 충청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도승지, 병조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영조 34년(1758)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악화되고 세자 폐위가 결정되자 채제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세자 폐위를 막아 철회시켰다. 이를 두고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채제공은 재상으로 일했던 10여 년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정조를 보필하였다. 정조 13년(1788) 우의정에 특채된 후 영의정에 올라 수원 화성을 건립하는 성역(城役)을 담당하다가 정조 23년(1798) 사직하였다.

비는 비각 안에 있으며,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의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었다. 받침돌과 지붕돌은 화강암이며 몸돌은 검은 빛깔의 오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을 누가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비문에는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과 애도의 마음이 담겨 있는데, 서두에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라고 칭송하였고,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정조는 “경(채제공)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독실하게 믿었노라”, “조정에 노성(老成, 채제공)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고 하며 채제공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건립 연대는 ‘기미(己未) 삼월(三月) 이십육일(二十六日)’이라고만 쓰여 있는데 채제공 문집인 『번암집(樊巖集)』에 ‘무덤 길에 비를 세우도록 명했다.(命竪碑墓道)’라는 기록이 있어 1799년 채제공이 죽은 후에 바로 정조의 명령에 따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예문관: 조선시대에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영문

Stele of Chae Je-gong Erected by King Jeongjo

This stele was erected in 1799 by King Jeongjo and bears an epitaph composed by the king to the renowned politician Chae Je-gong (1720-1799).

In 1743, Chae Je-g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nd began his career as a civil official. He served some of the highest-ranking official posts in the central government during the reigns of King Yeongjo (r. 1724-1776) and King Jeongjo and was a proponent of several important reforms. Some of the official posts held by Chae include chief royal secretary, minister of war, governor of Pyeongan-do Province, third, second, and chief state councilor.

In 1758 as Chae was appointed to the position of the chief royal secretary, the relationship between King Yeongjo and his son Crown Prince Sado was drastically deteriorating and when the king had already ordered to revoke the prince’s right for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Chae did not fear do persuade the monarch to change his decision and managed to withdraw the order. However, the conflict between the king and crown prince continued on and even grew into a strife between the major political powers until in 1761, the crown prince was ultimately denied the crown and executed which made his son the next to inherit the throne. Chae Je-gong remained in favor of both kings and gained their personal trust. It is said that King Yeongjo once said to his successor King Jeongjo: “Chae Je-gong is my selfless leige and your loyal subject.”

After ascending to the throne, King Jeongjo put a lot of effort into reinstating his father’s honor. In 1789, he moved Prince Sado’s tomb from the present-day Hwigyeong-dong in Seoul to an auspicious site in Suwon. Also, with the help of the best scholars and technicians of the time, the king began the construction of Hwaseong Fortress in Suwon. The responsibility of overseeing the construction and management of the fortress after its completion(?) was entrusted to Chae Je-gong who almost single-handedly carried out this duty until his retirement due to old age in 1798.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pedestal and the capstone are made of granite, while the body stone is made of black obsidian. The text of the stele includes commemoration of Chae's achievements and words of grief about his death. King Jeongjo praises Chae Je-gong by saying: “You are tall as a pine tree and rugged as a mountain,” “your spirit is as bright and immense as a cloud in the sky and your magnanimity is greater than the sea,” “oh, how devotedly I trusted you for …*,” “how will we keep the country safe without your presence at the court?” The king also mentions that according to the rumors, Chae was a filial son and calls him a truly rare kind of man.


  • I am not sure about this sentence. Especially that “경을 씀에” part...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명재상 채제공(1720-1799)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히 지은 글을 새겨 1799년에 세운 것이다.

채제공은 1743년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 두 국왕을 거치며 국정 운영의 중심에서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고, 도승지, 병조판서, 평안도 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여러 고위 관직을 지냈다.

채제공이 도승지로 임명된 1758년, 영조와 아들인 사도세자(1735-1762)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가 결정되었으나, 당시 왕의 명령을 받은 채제공이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설득하여 이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왕과 세자 사이의 갈등은 계속 커졌고 둘을 둘러싼 정쟁까지 심화되면서, 사도세자는 1761년 결국 폐위되고 처형 당하였으며 세자의 아들이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 모두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영조가 정조에게 “(채제공이야말로)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서울 휘경동에서 수원의 명당으로 옮기며,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수원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전체 공사를 총괄하는 책임을 채제공에게 맡겼으며, 채제공은 1798년 노환으로 사직할 때까지 화성 건설과 운영의 대부분을 책임졌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과 지붕돌은 화강암이며, 몸돌은 검은 빛깔의 오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에는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과 애도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서두에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라고 칭송하였고,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정조는 “경(채제공)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독실하게 믿었노라”, “조정에 노성(老成, 채제공)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고 하며 채제공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비문 내용은 적절히 의역하는 것이 좋겠음.

참고자료

  •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경기도 문화재 총람 도지정편 1』, 경기도,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86~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