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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임금에 의해 문중의 두 사람에게 충과 효에 대한 정려가 각각 내려지고, 두 사람의 정려를 보관하는 정려각이 나란히 서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한 임금에 의해 문중의 두 사람에게 충과 효에 대한 정려가 각각 내려지고, 두 사람의 정려를 보관하는 정려각이 나란히 서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이민정은 노년에 동생 이민적(李敏迪, 1702~1763)이 1761년에 지은 [[안동 체화정]](보물 제2051호)에서 함께 지냈다. 체화는 아가위나무 꽃을 말하며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을 상징한다.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이한오가 이곳에서 지내며 나이 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민정은 노년에 동생 이민적(李敏迪, 1702~1763)이 1761년에 지은 [[안동 체화정]](보물 제2051호)에서 함께 지냈다. 체화는 아가위나무 꽃을 말하며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을 상징한다.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이한오가 이곳에서 지내며 나이 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한오의 효행에 관련한 일화의 내용이 조금씩 다름 ; 김옥경의 논문 중 ‘쌍수당실기’에서 발췌한 것으로 소개한 내용을 근거로 작성'''<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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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오의 효행에 관련한 일화의 내용이 조금씩 다름 ; 김옥경의 논문 중 ‘쌍수당실기’에서 발췌한 것으로 소개한 내용을 근거로 작성'''
ver. 1 ; 한겨울 날씨에 약으로 쓸 잉어를 구하기 위해 낚시를 했고, 한밤중에 큰 잉어 한 마리를 잡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산에서 꿩 한마리가 그의 주위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둘을 함께 삶아 이치탕(鯉雉湯)을 만들어 아버지께 드렸더니 드디어 병환이 쾌유됐다고 한다. <br/> ver. 2 ; 병상에 계신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에 꿩고기를 찾아 산천을 헤매던 어느 날 지친 그분 앞에 꿩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잉어를 먹고 싶어 하는 부친을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오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용눌재는 “잉어는 안된다. 어른을 드리고 다시 올테니 기다려라”며 자신의 몸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서자 호랑이도 탄복해서 사라졌다는 현대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온다.  <br/>  ver. 3 ; 아버지가 민물고기를 즡겨 매일 5리 길이나 떨어진 큰 강에 나가 고기를 잡아왔다. 하루는 한밤중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가 사라졌다. 한번은 병든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했는데, 꿩을 구할 고민을 하던 중 마침 꿩이 집으로 날아들어와 채소밭에 떨어졌다. <br/>  ver. 4 ; 밤중에 잉어를 구해 돌아오던 길에 호랑이가 나타가 안광으로 길을 인도했고, 뒷산에서 꿩이 날아들어 이치탕을 만들어 부친에게 올리자 먹고 쾌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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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 1 ; 한겨울 날씨에 약으로 쓸 잉어를 구하기 위해 낚시를 했고, 한밤중에 큰 잉어 한 마리를 잡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산에서 꿩 한마리가 그의 주위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둘을 함께 삶아 이치탕(鯉雉湯)을 만들어 아버지께 드렸더니 드디어 병환이 쾌유됐다고 한다. <br/> ver. 2 ; 병상에 계신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에 꿩고기를 찾아 산천을 헤매던 어느 날 지친 그분 앞에 꿩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잉어를 먹고 싶어 하는 부친을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오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용눌재는 “잉어는 안된다. 어른을 드리고 다시 올테니 기다려라”며 자신의 몸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서자 호랑이도 탄복해서 사라졌다는 현대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온다.  <br/>  ver. 3 ; 아버지가 민물고기를 즡겨 매일 5리 길이나 떨어진 큰 강에 나가 고기를 잡아왔다. 하루는 한밤중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가 사라졌다. 한번은 병든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했는데, 꿩을 구할 고민을 하던 중 마침 꿩이 집으로 날아들어와 채소밭에 떨어졌다. <br/>  ver. 4 ; 밤중에 잉어를 구해 돌아오던 길에 호랑이가 나타가 안광으로 길을 인도했고, 뒷산에서 꿩이 날아들어 이치탕을 만들어 부친에게 올리자 먹고 쾌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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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2일 (토) 12:50 판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한자 禮安李氏 旌忠·旌孝閣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중앙길 119-1 (안교리)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8호
지정일 2003년 10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정충각은 임진왜란 때 풍천(豊川) 구담(九潭)에서 의병 700여명을 이끌고 왜군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 1525~1594)에게 내려진 정려(旌閭)를 게시한 건물로 1811년(순조 11)에 건립되었다.

정효각은 이홍인의 8대손인 용눌재(慵訥齋) 이한오(李漢伍, 1719~1793)의 효행에 대해 내려진 정려를 게시한 건물로 1812년(순조 12)에 건립되었다. 이한오는 전통적인 유가의 후예로서 충과 효가 생활의 기본임을 깨닫고, 오직 효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이에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각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충과 효에 대한 정려가 한 문중에 내려져 두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전각은 예안이씨 가문의 이홍인(李洪仁, 1525~1594)과 이한오(李漢伍, 1719~1793)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홍인의 정려는 조선 순조 11년(1811)에, 이한오의 정려는 1년 후인 순조 12년(1812)에 내려졌다.

조선시대에는 효자, 충신,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현판을 달아 정려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았다.

이홍인은 임진왜란 중 풍천 지역에서 의병을 이끌로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한오는 부모를 위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 이민정(李敏政)를 위해 한겨울에 잉어를 구해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가 그의 효심에 감복해 스스로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꿩이 저절로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와 그것을 잡아 잉어와 함께 약을 만들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두 건물 모두 맞배지붕을 올렸고, 세 면에 벽을 세웠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 한 임금에 의해 문중의 두 사람에게 충과 효에 대한 정려가 각각 내려지고, 두 사람의 정려를 보관하는 정려각이 나란히 서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 이민정은 노년에 동생 이민적(李敏迪, 1702~1763)이 1761년에 지은 안동 체화정(보물 제2051호)에서 함께 지냈다. 체화는 아가위나무 꽃을 말하며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을 상징한다.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이한오가 이곳에서 지내며 나이 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 이한오의 효행에 관련한 일화의 내용이 조금씩 다름 ; 김옥경의 논문 중 ‘쌍수당실기’에서 발췌한 것으로 소개한 내용을 근거로 작성
    • ver. 1 ; 한겨울 날씨에 약으로 쓸 잉어를 구하기 위해 낚시를 했고, 한밤중에 큰 잉어 한 마리를 잡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산에서 꿩 한마리가 그의 주위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둘을 함께 삶아 이치탕(鯉雉湯)을 만들어 아버지께 드렸더니 드디어 병환이 쾌유됐다고 한다.
      ver. 2 ; 병상에 계신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에 꿩고기를 찾아 산천을 헤매던 어느 날 지친 그분 앞에 꿩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잉어를 먹고 싶어 하는 부친을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오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용눌재는 “잉어는 안된다. 어른을 드리고 다시 올테니 기다려라”며 자신의 몸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서자 호랑이도 탄복해서 사라졌다는 현대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온다.
      ver. 3 ; 아버지가 민물고기를 즡겨 매일 5리 길이나 떨어진 큰 강에 나가 고기를 잡아왔다. 하루는 한밤중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가 사라졌다. 한번은 병든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했는데, 꿩을 구할 고민을 하던 중 마침 꿩이 집으로 날아들어와 채소밭에 떨어졌다.
      ver. 4 ; 밤중에 잉어를 구해 돌아오던 길에 호랑이가 나타가 안광으로 길을 인도했고, 뒷산에서 꿩이 날아들어 이치탕을 만들어 부친에게 올리자 먹고 쾌유했다고 한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3413704480000 -> 정충각은 임진왜란 때 풍천(豊川) 구담(九潭)에서 의병 700여명을 이끌고 왜군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농은(農隱) 이홍인(李洪仁, 1525­1594)에게 내려진 정려(旌閭)를 게시한 건물로 1811년(순조 11)에 건립되었다. 정효각은 이홍인의 8대손인 용눌재(?訥齋) 이한오(李漢伍, 1719­1793)의 효행에 대해 내려진 정려를 게시한 건물로 1812년(순조 12)에 건립되었다. 이한오는 전통적인 유가의 후예로서 충과 효가 생활의 기본임을 깨닫고, 오직 효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여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였던 분이다. 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충과 효에 대한 정려가 한 문중에 내려져 두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 벼슬도 마다한 지극한 효심 곳곳에 깃들어, 경북일보, 2010.5.27.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0123 -> 경북 안동에서 풍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체화정은 진사(進士) 만포(晩圃) 이민적(李敏迪·1663∼1744)공이 효종(孝宗) 때 처음 지어 학문(學問)을 닦던 곳으로, 작고 아름다운 정자"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훗날 순조(純祖12년)가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린 바 있는 만포공의 아들인 용눌재(墉訥齋) 이한오(李漢伍)공이 노모를 이곳에 모시어 효성을 다하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 이상일 학예연구사로부터 용눌재 이한오(墉訥齋 李漢伍)공의 효행이야기를 들어본다. 풍은공의 9세손인 용눌재 이한오(墉訥齋 李漢伍)공은 효성이 지극하시어 일생을 오직 부모님을 섬기는 데만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아버지의 병환에 잉어와 꿩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 약으로 쓸 잉어를 구하러 십여 리 떨어져 있는 낙동강에 나가 얼음낚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잉어를 하루 빨리 구해야한다는 마음에 온 종일 배를 골아가며 낚시를 했으나, 잉어는 몇날 며칠동안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약으로 쓸 잉어를 잡지 못하는 것은 자식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그는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여러 날 낚시하며 기다리던 중, 어느 날 깊은 밤중에 큰 잉어 한 마리가 낚시에 걸려들었지요. 한오공은 너무나 기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뒷산에서 꿩 한마리가 그의 주위에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꿩을 잡아 잉어와 함께 삶아 이치탕(鯉雉湯)을 만들어 아버지께 드렸더니 드디어 병환이 쾌유됐다고 합니다. 그의 효심은 하늘마저 감복시켜 아버지 병을 낫게 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종가] 41.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경북일보, 2017.3.12.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7448 -> 효행으로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진 조선 순조 때의 용눌재 이한오는 병상에 계신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에 꿩고기를 찾아 산천을 헤매던 어느 날 지친 그분 앞에 꿩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잉어를 먹고 싶어 하는 부친을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오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용눌재는 “잉어는 안된다. 어른을 드리고 다시 올테니 기다려라”며 자신의 몸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서자 호랑이도 탄복해서 사라졌다는 현대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온다. 결국 그의 지극한 효행이 전해져 순조 12년에 정려를 받았다.
  • 김옥경, 「종가문화 계승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개발 - 보물 553호 예안이씨 충효당파 종택 활용-」,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