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이씨 정충 정효각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Commemorative Pavilions of Yi Hong-in and Yi Ha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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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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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ommemorative Pavilions of Yi Hong-in and Yi Han-o |
한자 | 禮安李氏 旌忠·旌孝閣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중앙길 119-1 (안교리)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8호 |
지정(등록)일 | 2003년 10월 2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수량/면적 | 2동 |
웹사이트 |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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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조선 시대에는 효자나 충신, 또는 열녀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 행적을 기록하고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그리고 현판을 달아 정려문을 세우거나 돌에 새겨 정려비를 세우고,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았다. 예안 이씨 정충·정효각은 예안 이씨 이홍인(李洪仁)의 충절과 그의 후손인 이한오(李漢伍)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이홍인과 이한오의 정려는 각각 순조 11년(1811)과 순조 12년(1812)에 내려졌다.
이홍인은 풍산에 처음 정착한 예안 이씨인 이영, 이전, 이훈 삼 형제 중 이전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안동 구담리 지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한오는 아버지를 위해 한겨울에 잉어를 구해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으나, 호랑이가 그의 효심에 감복해 스스로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꿩이 저절로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와 잉어와 함께 약을 만들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정충·정효각에서 남동쪽으로 약 750m 떨어진 곳에는 이홍인 가문의 종택*인 예안 이씨 충효당(보물)이 있다.
- 종택(宗宅):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
영문
Commemorative Pavilions of Yi Hong-in and Yi Han-o
These two pavilions house plaques commemorating the patriotic loyalty of Yi Hong-in (1525-1594) and the filial devotion of his descendant Yi Han-o (1719-1793).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commemorative plaques or steles were bestowed by the government to honor a person’s patriotic loyalty, filial devotion, or matrimonial devotion and were meant to be hung on red gates or in pavilions in front of the honored family’s home. These plaques were issued to Yi Hong-in and Yi Han-o in 1811 and 1812, respectively.
Yi Hong-in was the second son of Yi Jeon (1486-1529), who, alongside his brothers Yi Yeong (1482-?) and Yi Hun (1489-1552), became the first members of the Yean Yi Clan to settle in Pungsan (present-day Pungsan-eup, Andong). When Japan invaded Korea in 1592, Yi Hong-in gave all of his personal possessions to mobilize a local civilian army and died heroically in a battle in Gudam-ri Village, Andong.
Yi Han-o became known as a filial son for curing his father of illness. It is said that in the depths of winter, Yi went to catch a carp for his father. On his way home, he encountered a tiger, but the tiger, moved by Yi’s filial devotion, went away on its own. Upon arriving home, a pheasant flew into the yard, allowing itself to be caught. Yi then used the carp and pheasant to prepare medicine, which cured his father.
Located about 750 m to the southeast of the pavilions is Chunghyodang House (Treasure), the head house of Yi Hong-in’s descendants.
영문 해설 내용
예안이씨 이홍인(1525-1594)의 충절과 이한오(1719-1793)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이홍인과 이한오의 정려는 각각 1811년과 1812년에 내려졌다.
이홍인은 예안이씨 중 풍산에 처음 정착한 이영(1482-?), 이전(1486-1529), 이훈(1489-1552) 삼형제 중 이전의 둘째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안동 구담리 지역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한오는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한 효행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겨울에 아버지를 위해 잉어를 구해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으나, 호랑이가 그의 효심에 감복해 스스로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꿩이 저절로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꿩과 잉어로 약을 만들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정충·정효각에서 남동쪽으로 약 750m 떨어진 곳에는 이홍인 가문의 종택인 예안이씨 충효당(보물)이 있다.
참고자료
-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4480000 -> 정충각은 임진왜란 때 풍천(豊川) 구담(九潭)에서 의병 700여명을 이끌고 왜군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농은(農隱) 이홍인(李洪仁, 15251594)에게 내려진 정려(旌閭)를 게시한 건물로 1811년(순조 11)에 건립되었다. 정효각은 이홍인의 8대손인 용눌재(?訥齋) 이한오(李漢伍, 17191793)의 효행에 대해 내려진 정려를 게시한 건물로 1812년(순조 12)에 건립되었다. 이한오는 전통적인 유가의 후예로서 충과 효가 생활의 기본임을 깨닫고, 오직 효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여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였던 분이다. 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충과 효에 대한 정려가 한 문중에 내려져 두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 예안이씨 정충정효각,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13
- 벼슬도 마다한 지극한 효심 곳곳에 깃들어, 경북일보, 2010.5.27.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0123 -> 경북 안동에서 풍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체화정은 진사(進士) 만포(晩圃) 이민적(李敏迪·1663∼1744)공이 효종(孝宗) 때 처음 지어 학문(學問)을 닦던 곳으로, 작고 아름다운 정자"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훗날 순조(純祖12년)가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린 바 있는 만포공의 아들인 용눌재(墉訥齋) 이한오(李漢伍)공이 노모를 이곳에 모시어 효성을 다하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 이상일 학예연구사로부터 용눌재 이한오(墉訥齋 李漢伍)공의 효행이야기를 들어본다. 풍은공의 9세손인 용눌재 이한오(墉訥齋 李漢伍)공은 효성이 지극하시어 일생을 오직 부모님을 섬기는 데만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아버지의 병환에 잉어와 꿩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에 약으로 쓸 잉어를 구하러 십여 리 떨어져 있는 낙동강에 나가 얼음낚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잉어를 하루 빨리 구해야한다는 마음에 온 종일 배를 골아가며 낚시를 했으나, 잉어는 몇날 며칠동안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약으로 쓸 잉어를 잡지 못하는 것은 자식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그는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여러 날 낚시하며 기다리던 중, 어느 날 깊은 밤중에 큰 잉어 한 마리가 낚시에 걸려들었지요. 한오공은 너무나 기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뒷산에서 꿩 한마리가 그의 주위에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꿩을 잡아 잉어와 함께 삶아 이치탕(鯉雉湯)을 만들어 아버지께 드렸더니 드디어 병환이 쾌유됐다고 합니다. 그의 효심은 하늘마저 감복시켜 아버지 병을 낫게 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종가] 41.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 경북일보, 2017.3.12.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7448 -> 효행으로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진 조선 순조 때의 용눌재 이한오는 병상에 계신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에 꿩고기를 찾아 산천을 헤매던 어느 날 지친 그분 앞에 꿩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잉어를 먹고 싶어 하는 부친을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오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용눌재는 “잉어는 안된다. 어른을 드리고 다시 올테니 기다려라”며 자신의 몸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서자 호랑이도 탄복해서 사라졌다는 현대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온다. 결국 그의 지극한 효행이 전해져 순조 12년에 정려를 받았다.
- 김옥경, 「종가문화 계승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개발 : 보물 553호 예안이씨 충효당파 종택 활용」,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http://www.riss.kr.openlink.aks.ac.kr:8080/link?id=T14017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