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영월부 관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국문)
23번째 줄: 23번째 줄:
 
=='''해설문'''==
 
=='''해설문'''==
 
===국문===
 
===국문===
관아는 조선시대 관청으로 수령이 정무를 보는 동헌과 생활하는 내아, 관리들이 집무를 보던 부속건물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동헌 가까이에는 객사를 두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사신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영월부 관아는 동헌 영역은 모두 사라지고, 객사 영역의 건물과 자규루만 남아 있다. 영월부 관아의 모습은 1791년(정조 15)에 그려진 『월중도(越中圖)』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월중도는 단종의 유배지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자취와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의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
관아는 조선 시대 관청으로 수령이 정무를 보는 동헌과 생활하는 내아, 관리들이 집무를 보던 부속 건물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동헌 가까이에는 객사를 두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절을 하던 망궐례를 지냈으며, 사신들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영월부 관아는 동헌 영역은 모두 사라지고, 객사 영역의 건물과 자규루만 남아 있다. 영월부 관아의 모습은 정조 15년(1791)에 그려진 ‘월중도(越中圖)’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월중도는 영월에 남은 단종의 자취와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된 17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해진다. 세조 3년(1457)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루(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을 담은 있는 시를 지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벼슬이나 지위가 낮아짐)된 17년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한다. 세조 3년(1457)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루(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을 담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영월부 관아의 객사는 태조 5년(1396)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정조 15년(1791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정면 5칸, 서익헌은 정면 4칸, 중앙 정청은 정면 3칸이며, 자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누각 건물이다.  
+
영월부 관아의 객사는 태조 5년(1396)에 세웠다고 전하며, 정조 15년(1791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앞면 5칸, 서익헌은 앞면 4칸, 중앙 정청은 앞면 3칸이며, 자규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구성된 누각이다.
  
2013년·2015년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건물지, 박석시설, 내삼문지를 비롯하여 객사 건물로부터 내삼문지에 이르는 보도시설과 월중도에 표현된 관풍헌으로부터 자규루로 연결된 보도시설이 확인되었다. 객사 바로 북쪽에는 동헌 영역의 건물군이 『월중도』에는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도시화되면서 근현대 건물이 들어서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
2013년과 2015년에 발굴 조사를 하여 건물터, 박석(바닥 포장돌) 시설, 내삼문(바깥채 안쪽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터를 비롯하여 객사 건물로부터 내삼문 터에 이르는 보도 시설과 월중도에 표현된 관풍헌으로부터 자규루로 연결된 보도 시설을 확인하였다. ‘월중도’에는 객사 바로 북쪽에 동헌 영역의 건물군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도시화되면서 근현대 건물이 들어서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영문===
 
===영문===

2024년 2월 27일 (화) 13:33 판


영월부 관아
Yeongwol-bu Government Office
영월부 관아, 디지털영월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영월부 관아
영문명칭 Yeongwol-bu Government Office
한자 寧越府 官衙
주소 강원도 영월군 중앙로 61
지정번호 사적 제534호
지정일 2016년 3월 8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객사건물 3동(관풍헌,정청,서익헌) 외 자규루/5,808㎡
웹사이트 영월부 관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관아는 조선 시대 관청으로 수령이 정무를 보는 동헌과 생활하는 내아, 관리들이 집무를 보던 부속 건물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동헌 가까이에는 객사를 두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절을 하던 망궐례를 지냈으며, 사신들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영월부 관아는 동헌 영역은 모두 사라지고, 객사 영역의 건물과 자규루만 남아 있다. 영월부 관아의 모습은 정조 15년(1791)에 그려진 ‘월중도(越中圖)’에 잘 표현되어 있다. 월중도는 영월에 남은 단종의 자취와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벼슬이나 지위가 낮아짐)된 채 17년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한다. 세조 3년(1457)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루(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을 담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영월부 관아의 객사는 태조 5년(1396)에 세웠다고 전하며, 정조 15년(1791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의 동익헌인 관풍헌은 앞면 5칸, 서익헌은 앞면 4칸, 중앙 정청은 앞면 3칸이며, 자규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구성된 누각이다.

2013년과 2015년에 발굴 조사를 하여 건물터, 박석(바닥 포장돌) 시설, 내삼문(바깥채 안쪽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터를 비롯하여 객사 건물로부터 내삼문 터에 이르는 보도 시설과 월중도에 표현된 관풍헌으로부터 자규루로 연결된 보도 시설을 확인하였다. ‘월중도’에는 객사 바로 북쪽에 동헌 영역의 건물군이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도시화되면서 근현대 건물이 들어서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