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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풍산김씨 영감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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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풍산 김씨 21대손 김상목(1726~1765)이 1759년에 처음 지었다. 1814년 김상목의 손자인 김중우(1780~1849, 호 학남)가 증축을 완료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1804~1877)이 동부승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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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풍산 김씨 21대손 김상목(金相穆, 1726~1765)이 조선 영조 35년(1759)에 처음 지었다. 순조 26년(1814) 김상목의 손자인 김중우(金重佑, 1780~1849)가 증축을 완료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동부승지(同副承旨)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집이 위치한 오미마을은 풍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이 집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김응섭(1878~1957) 3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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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위치한 오미마을은 풍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이 집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김응섭(金應燮, 1878~1957) 3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집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창고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 뒤쪽에 담장을 둘러 공간을 나눈 후 그 안에 사당을 세웠다.
 
집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창고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 뒤쪽에 담장을 둘러 공간을 나눈 후 그 안에 사당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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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에 자리한 사랑채는 대청마루가 돌출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내었다. 마루에 걸려있는 현판에 적힌 ‘학남유거’는 김중우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오른편에 자리한 사랑채는 대청마루가 돌출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내었다. 마루에 걸려있는 현판에 적힌 ‘학남유거’는 김중우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오미마을에서는 김정섭 3형제(김두흠의 증손자임) 외에도 의열단원 김지섭,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재봉 등 모두 24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김응섭의 큰 형 김정섭(1862~1934)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에 큰 공을 세운 경주 교동 최부자댁의 주인 최준의 장인이다. 김응섭의 작은 형은 김이섭(1876~195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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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마을에서는 김정섭 3형제(김두흠의 증손자임) 외에도 의열단원 김지섭,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재봉 등 모두 24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김응섭의 큰 형 김정섭(1862~1934)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에 큰 공을 세운 경주 교동 최부자댁의 주인 최준의 장인이다. 김응섭의 작은 형은 김이섭(1876~195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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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1일 (금) 00:55 판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한자 安東 豊山金氏 令監宅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구수나무길 57 (오미리)
지정번호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39호
지정일 1982년 12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일곽(6동)
웹사이트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주택은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으로 조선 영조(英祖) 35년(1759)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지낸 김상목(金相穆)이 지었다. 처음에는 ‘ㄱ’자형으로 안채 8칸을 지었으며 순조(純祖) 26년(1826)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학남(鶴南) 김중우(金重佑)가 ‘ㄴ’자형 건물을 증축하였다.

이 건물의 명칭은 김중우의 아들 낙애(洛厓) 김두흠(金斗欽)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의 벼슬을 지냄으로써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문채, 정침, 부속채가 있으며,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가묘를 세웠다. 이 집은 건립연대를 달리 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口’자형 주택이 아니라 복합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전반적으로 사대부가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풍산 김씨 21대손 김상목(金相穆, 1726~1765)이 조선 영조 35년(1759)에 처음 지었다. 순조 26년(1814) 김상목의 손자인 김중우(金重佑, 1780~1849)가 증축을 완료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동부승지(同副承旨)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집이 위치한 오미마을은 풍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이 집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김응섭(金應燮, 1878~1957) 3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집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창고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 뒤쪽에 담장을 둘러 공간을 나눈 후 그 안에 사당을 세웠다.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지만, 건립된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며,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 오른편에 자리한 사랑채는 대청마루가 돌출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내었다. 마루에 걸려있는 현판에 적힌 ‘학남유거’는 김중우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 오미마을에서는 김정섭 3형제(김두흠의 증손자임) 외에도 의열단원 김지섭,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재봉 등 모두 24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김응섭의 큰 형 김정섭(1862~1934)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에 큰 공을 세운 경주 교동 최부자댁의 주인 최준의 장인이다. 김응섭의 작은 형은 김이섭(1876~1958)이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배영동, 『(경북의 종가문화) 청백정신과 팔련오계로 빛나는, 안동 허백당 김양진 종가』, 예문서원, 2016, pp.126-127 -> 김상목 생몰년 및 집의 증축 완료 시기(1814년) 인용.
  •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443700390000 -> 내부 사진(2015년 촬영)
  • 와가(瓦家)가 즐비하게 늘어선 오미마을,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C010104 ->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 김응섭(金應燮)의 생가이기도 하다. / 사실 현재 영감댁이 위치한 터는 원래 허백당 종택이 자리했던 곳으로, 오미리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장소이다. 1576년 김대현에 이르러 허백당 종택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명당을 포기하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간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할 길이 없다.
  •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안동 관광https://www.tourandong.com/public/sub4/sub3.cshtml?seq=349&page=18&searchKey=0&search=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설명과 거의 유사 ; 전면 우측에 위치한 사랑은 잡석 기단위에 비교적 큰 초석을 놓고 일부에 원주를 사용하여 사대부가의 격식을 차리고 있다. 당호는 김중우의 자제인 낙애 김두흠이 통정대부 동부승지의 벼슬을 지낸데서 유래하였다. 5칸 대문채를 들어서면 서쪽으로 사랑방채가 보인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날개집처럼 대청 2칸이 돌출하였다. 전퇴 밖으로 계자각 난간을 두어 운치를 돋우었다. 대청의 넓은 마루와 방과의 간벽은 전,후퇴와 1칸이 구조되듯이 보이도록 의장되었고 후퇴에 쪽문이 1칸엔 분합이 달렸다. 분합의 궁판에 동자가 두가닥 세워져 있다 5량가이며 천장은 연등이고 눈섭천장이 결구되었다. 방은 2통칸이다. 대문쪽으로 난 방이 아랫방에 해당하고 윗방이 북행하는 건물과 통행하게 된다. 방의 바깥벽엔 문얼굴이 머름위에 섰고 띠살의 분합이 덧문으로 달리고 안쪽엔 아자무늬의 미닫이가 맹장지로 달렸고 두껍닫이가 설비되어 있다 밝은 빛이 들어온다. 아랫방과 윗방과의 사이에 네쪽 맹애자의 샛장지를 달았다. 중문채 안에는 반듯한 내정이 있다. 정침은 이 마을 여타 집들과 다르다. 정상적인 口자형이 아니라 복합적인 구성이다. 이는 건립년대를 서로 달리 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안방의 대청은 정면이 2칸이고 3량가이며 안방의 천장 위 더그매에 계속되고 있다. 안방천장은 고미반자이다. 안방에서 대청에 나가는 문은 외짝 띠살무늬이다. 정침 동북 모서리쪽에서 사이를 두고 흙담으로 일곽을 이룬 가묘가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사우인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 (참고) 김정섭일록, 한국학자료센터 영남권역센터 https://yn.ugyo.net/dir/list?uci=KSAC%2BK03%2BKSM-WM.1920.4717-20110630.006310200068 -> 『金鼎燮日錄』은 경상북도안동풍산읍오미리에 거주하는 김정섭이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 이 일기는 15년간의 기록으로, 1920년 1월 1일(음) 송년을 보낸 김정섭이 평양 감옥에 있는 아우 金履燮(1876~1958), 상해에 있는 둘째 동생 金應燮(1878~1957) 등을 그리워하는 말로 시작한다. 김응섭은 1919년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으로 활동하다가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위원, 서로군정서 법무사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 (참고) 김응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