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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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주택은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으로 조선 영조(英祖) 35년(1759)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지낸 김상목(金相穆)이 지었다. 처음에는 ‘ㄱ’자형으로 안채 8칸을 지었으며 순조(純祖) 26년(1826)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학남(鶴南) 김중우(金重佑)가 ‘ㄴ’자형 건물을 증축하였다.

이 건물의 명칭은 김중우의 아들 낙애(洛厓) 김두흠(金斗欽)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의 벼슬을 지냄으로써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문채, 정침, 부속채가 있으며,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가묘를 세웠다. 이 집은 건립연대를 달리 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口’자형 주택이 아니라 복합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전반적으로 사대부가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풍산 김씨 21대손 김상목(金相穆, 1726~1765)이 조선 영조 35년(1759)에 처음 지었다. 순조 26년(1814) 김상목의 손자인 김중우(金重佑, 1780~1849)가 증축을 완료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동부승지(同副承旨)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집이 위치한 오미마을은 풍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이 집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김응섭(金應燮, 1878~1957) 3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집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창고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 뒤쪽에 담장을 둘러 공간을 나눈 후 그 안에 사당을 세웠다.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지만, 건립된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며, 조선 후기 사대부 주택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 오른편에 자리한 사랑채는 대청마루가 돌출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내었다. 마루에 걸려있는 현판에 적힌 ‘학남유거’는 김중우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 오미마을에서는 김정섭 3형제(김두흠의 증손자임) 외에도 의열단원 김지섭,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재봉 등 모두 24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김응섭의 큰 형 김정섭(1862~1934)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에 큰 공을 세운 경주 교동 최부자댁의 주인 최준의 장인이다. 김응섭의 작은 형은 김이섭(1876~1958)이다.)

1차 수정

풍산김씨 영감댁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김상목(金相穆, 1726~1765)이 영조 35년(1759)에 지은 사대부가의 주택이다. 처음에는 ‘ㄱ’자형의 안채만 있었는데, 김상목의 손자인 김중우(金重佑, 1780~1849)가 순조 26년(1814) 지금의 구조로 증축하면서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게 되었다.

‘영감’이란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동부승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이 집을 ‘영감댁’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집은 김두흠의 증손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김정섭(1862~1934), 김이섭(1876~1958), 김응섭(金應燮, 1878~1957)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영감댁은 대문채, 정침, 창고,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당은 정침 뒤쪽에 담장을 둘러 독립된 공간을 갖도록 하였다.

  •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선시대 임금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 속한 정3품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