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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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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심연원(1491-1558)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60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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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원은 152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1533년에는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고, 1539년 명나라 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선의 왕을 대신해 조의를 표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546년에는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51년에는 최고위 관직인 영의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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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년부터 1537년까지 탐라(지금의 제주)의 목사로 있을 때 그곳 산천을 세밀하게 지도로 그려 두었는데, 1555년 왜구가 침입했을 때 그 지도로 대응책을 세워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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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2024년 3월 30일 (토) 11:32 판


심연원 신도비
심연원 신도비, 경기도문화재 : 육구삼+ Series, 경기문화재단.
대표명칭 심연원 신도비
한자 沈連源 神道碑
주소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옹정리 58-12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6호
지정일 1992년 12월 3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심연원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시대 문신으로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심연원(沈連源, 1491~1558)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비석으로 1560년에 세워졌다.

심연원 신도비는 귀부이수양식(거북이받침과 용머리 장식돌)으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심연원이 탐라(제주)목사로 있을 때 그곳 산천을 세밀하게 지도로 그려 두었는데 1555년 왜구가 침입했을 때 그 지도로 대응책을 세워 막을 수 있었다.

관직에 올라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고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이 되었으며 세상을 떠난 후 청성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심연원(1491-1558)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60년에 세워졌다.

심연원은 152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1533년에는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고, 1539년 명나라 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선의 왕을 대신해 조의를 표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546년에는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51년에는 최고위 관직인 영의정에 이르렀다.

1534년부터 1537년까지 탐라(지금의 제주)의 목사로 있을 때 그곳 산천을 세밀하게 지도로 그려 두었는데, 1555년 왜구가 침입했을 때 그 지도로 대응책을 세워 막을 수 있었다.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