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해설문

수원 화성 - 화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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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서문
Hwaseomun Gate, Suwon
대표명칭 수원 화서문
영문명칭 Hwaseomun Gate, Suwon
한자 水原 華西門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4
지정번호 보물 제403호
지정일 1964년 9월 3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궁궐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설문

영문용 원고

화성의 서쪽 출입문이다. 문 이름은 화성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문 이름과 달리 문이 놓여 있는 위치는 화성의 서북쪽이다. 서쪽 중앙에 팔달산 정상이 있기 때문에 문은 산기슭을 피해 기슭이 끝나는 서북쪽에 세웠다. 건물은 1796년 화성 축성 당시에 지어진 것이다. 문 앞에는 반원형의 보조 성벽을 두고 출입구를 한쪽 모서리에 열었다. 이런 방식은 서울의 동대문에서도 볼 수 있다. 석축 위에 단층 누각을 세워서 남북 정문보다 격식을 낮게 했다. 문 동편에 높은 망루 건물이 있고 문 앞의 반원형 보조 성벽이 한데 어울려 화성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

참고

기존 국문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18 국문

화성의 서쪽 출입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문을 나서면 구불구불한 길이 멀리 시흥군으로 이어졌다. 문 안쪽으로는 지금도 성내 시가지로 통하는 옛 골목길이 잘 남아있다. 성문 앞에 옹성을 두었으며 오른쪽으로 성벽이 이어지면서 높은 망루인 서북공심돈이 우뚝 서 있어서 문과 조화를 이룬다.

석축과 문루, 옹성은 1796년(정조20) 세워진 것으로, 팔달문과 함께 화성 창건 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현판도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채제공이 글씨 쓴 것이 그대로 걸려있다. 석축은 높이 5.4미터로 반듯하게 잘 다듬은 장대석을 줄맞추어 쌓아 올리고 한 가운데 폭 4.3미터의 출입문을 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들이 힘을 합해 석축을 쌓았다. 석축 위 누각은 정면 3칸 가운데 유독 가운데 어칸의 폭이 넓다. 어칸의 기둥 사이 간격은 5.7미터가 넘는다. 어칸 폭이 넓은 이유는 석축 출입문 폭보다 기둥 간격을 넓게 잡아야하기 때문이었다. 어칸의 기둥머리를 연결하는 창방은 좌우 협칸의 창방에 비해 두께가 1.3배는 된다. 굵은 재목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칸 창방이 약간 처진 모습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이익공이 짜여지고 쇠서는 새 날개 같은 날렵한 모습이다. 기둥 사이 화반도 곡선이 반복되면서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을 하고 있다. 화서문을 지은 목수 우두머리는 손삼득과 손동현으로, 두 사람은 관청에 속한 장인이 아니고 서울에 살던 민간 장인이었으며 공사를 마친 후 장인에게 상을 줄 때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

1797년(정조21) 정조가 축성이 끝나고 처음 화성에 내려와서 서장대를 들렀다가 곧바로 화서문 문루에 올라가 주변을 바라보고 또 신하들에게 공심돈의 특징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1870년(고종7)에는 고종이 군복을 갖추어 입고 화서문을 찾은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