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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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영문용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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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화성의 북쪽 정문이다. 남쪽에는 또 하나의 정문인 팔달문이 있다. 장안문은 서울을 바라보고 있으며 국왕이 화성에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지났다. 문은 조선왕조 수도의 정문인 서울의 남대문과 같은 형태이면서 약 1미터 더 높다. 장안문에는 서울 남대문에 없는 새로운 시설이 있다. 문 앞에 반원형의 보조 성벽을 쌓고 문 좌우에 감시하는 대를 갖추어 방어 기능을 높였다. 화성은 정조가 은퇴한 후에 머물려는 계획을 가졌기 때문에 도성과 유사한 성곽형태를 취하고 18세기의 지식을 가미하여 더 발달된 모습으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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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북쪽 정문이다. 장안문이라는 이름은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원침(현륭원)을 바라보아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리는’ 뜻에서 ‘길이(長), 편안함(安)’을 상징한다고 정조 자신이 풀이했다. 문 앞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두고 좌우에는 적대를 세워 방비를 든든하게 했는데, 석축 위에 세운 문루는 화성 내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정면 기둥 간격이 5칸이고 측면은 2칸인데 문루에는 위장을 비롯해서 많은 군사들이 주변을 지켰다. 처마 밑에는 다포라고 하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재들을 가득 짜 올렸다.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1백 년 동안 좀처럼 만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포를 만들기 위해 강원도에서 승려 목수 굉흡이 화성에 와서 일했다. 지붕은 네 방향의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방식인데, 이런 지붕은 긴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시대에는 좀처럼 만들지 못하고 궁궐 정문이나 서울 남대문, 동대문 같은 곳에서만 했는데, 장안문도 우진각 지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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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완성되자 정조는 해마다 이 문을 지나 현륭원을 찾았으며 뒤를 이은 순조, 헌종, 철종, 고종도 이 문을 지났다. 1800년 정조가 승하했을 때는 정조의 재궁(시신을 모신 관)이 이 문을 지나 무덤으로 향했다. 장안문 바깥은 대유평이라는 넓은 들판이 있어서 이곳에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농경지를 가꾸었다. 서울에 있는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시대 성문을 대표하는 문이다. 6.25 전쟁 중에 폭격을 당해 문루가 사라졌다가 1979년 화성 복원정화 사업으로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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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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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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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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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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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2018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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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북쪽 정문이다. 남쪽에는 또 하나의 정문인 팔달문이 있다. 장안문은 서울을 바라보고 있으며 국왕이 화성에 올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지났다. 문은 조선왕조 수도의 정문인 서울의 남대문과 같은 형태이면서 약 1미터 더 높다. 장안문에는 서울 남대문에 없는 새로운 시설이 있다. 문 앞에 반원형의 보조 성벽을 쌓고 문 좌우에 감시하는 대를 갖추어 방어 기능을 높였다. 화성은 정조가 은퇴한 후에 머물려는 계획을 가졌기 때문에 도성과 유사한 성곽형태를 취하고 18세기의 지식을 가미하여 더 발달된 모습으로 지어졌다.  
화성의 북쪽 정문이다. 장안문이라는 이름은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원침(현륭원)을 바라보아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리는’ 뜻에서 ‘길이(長), 편안함(安)’을 상징한다고 정조 자신이 풀이했다. 문 앞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두고 좌우에는 적대를 세워 방비를 든든하게 했는데, 석축 위에 세운 문루는 화성 내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정면 기둥 간격이 5칸이고 측면은 2칸인데 문루에는 위장을 비롯해서 많은 군사들이 주변을 지켰다. 처마 밑에는 다포라고 하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재들을 가득 짜 올렸다.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1백 년 동안 좀처럼 만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포를 만들기 위해 강원도에서 승려 목수 굉흡이 화성에 와서 일했다. 지붕은 네 방향의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방식인데, 이런 지붕은 긴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시대에는 좀처럼 만들지 못하고 궁궐 정문이나 서울 남대문, 동대문 같은 곳에서만 했는데, 장안문도 우진각 지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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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완성되자 정조는 해마다 이 문을 지나 현륭원을 찾았으며 뒤를 이은 순조, 헌종, 철종, 고종도 이 문을 지났다. 1800년 정조가 승하했을 때는 정조의 재궁(시신을 모신 관)이 이 문을 지나 무덤으로 향했다. 장안문 바깥은 대유평이라는 넓은 들판이 있어서 이곳에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농경지를 가꾸었다. 서울에 있는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시대 성문을 대표하는 문이다. 6.25 전쟁 중에 폭격을 당해 문루가 사라졌다가 1979년 화성 복원정화 사업으로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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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수원시 문화유산]]
 
[[분류:수원시 문화유산]]
 
[[분류:성곽]]
 
[[분류:성곽]]

2018년 12월 6일 (목) 13:09 판


해설문

국문

화성의 북쪽 정문이다. 장안문이라는 이름은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원침(현륭원)을 바라보아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리는’ 뜻에서 ‘길이(長), 편안함(安)’을 상징한다고 정조 자신이 풀이했다. 문 앞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두고 좌우에는 적대를 세워 방비를 든든하게 했는데, 석축 위에 세운 문루는 화성 내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정면 기둥 간격이 5칸이고 측면은 2칸인데 문루에는 위장을 비롯해서 많은 군사들이 주변을 지켰다. 처마 밑에는 다포라고 하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재들을 가득 짜 올렸다.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1백 년 동안 좀처럼 만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포를 만들기 위해 강원도에서 승려 목수 굉흡이 화성에 와서 일했다. 지붕은 네 방향의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방식인데, 이런 지붕은 긴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시대에는 좀처럼 만들지 못하고 궁궐 정문이나 서울 남대문, 동대문 같은 곳에서만 했는데, 장안문도 우진각 지붕이었다.

문이 완성되자 정조는 해마다 이 문을 지나 현륭원을 찾았으며 뒤를 이은 순조, 헌종, 철종, 고종도 이 문을 지났다. 1800년 정조가 승하했을 때는 정조의 재궁(시신을 모신 관)이 이 문을 지나 무덤으로 향했다. 장안문 바깥은 대유평이라는 넓은 들판이 있어서 이곳에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농경지를 가꾸었다. 서울에 있는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시대 성문을 대표하는 문이다. 6.25 전쟁 중에 폭격을 당해 문루가 사라졌다가 1979년 화성 복원정화 사업으로 다시 세워졌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화성의 북쪽 정문이다. 남쪽에는 또 하나의 정문인 팔달문이 있다. 장안문은 서울을 바라보고 있으며 국왕이 화성에 올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지났다. 문은 조선왕조 수도의 정문인 서울의 남대문과 같은 형태이면서 약 1미터 더 높다. 장안문에는 서울 남대문에 없는 새로운 시설이 있다. 문 앞에 반원형의 보조 성벽을 쌓고 문 좌우에 감시하는 대를 갖추어 방어 기능을 높였다. 화성은 정조가 은퇴한 후에 머물려는 계획을 가졌기 때문에 도성과 유사한 성곽형태를 취하고 18세기의 지식을 가미하여 더 발달된 모습으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