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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암 수명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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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암수명유허비
송우암 수명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송우암수명유허비
한자 宋尤庵受命遺墟痺
주소 전북 정읍시 우암로 54-1 (수성동)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정일 1974년 9월 27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송우암 수명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송우암 수명 유허비는 조선 후기 유학자 송시열(宋時烈)의 죽음을 기려, 그가 죽은 곳에 세운 것이다. 숙종 15년(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 간 송시열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다시 끌려오던 도중, 6월 8일 새벽에 정읍에 도착하여 객사에서 사약을 받고 바로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송시열의 무고함이 밝혀져 영조 7년(1731)에 그가 사약을 받았던 이 자리에 비를 세웠다. 현재의 비각은 1925년에 군수 이동한이 다시 세운 것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송시열(1607~1689, 호 우암)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1731년에 세운 것이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의 영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 1666년 충청북도 괴산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1689년 희빈 장씨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송시열의 무고함이 밝혀졌고, 그가 사약을 받았던 자리에 이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이의현(1669∼1745)이 지었고, 이양신(1689∼1739)이 글씨를 썼으며, 민진원(1644∼1736)이 전서(篆書)를 썼다.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은 1925년 군수 이동한이 정비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 관련 있는 세 사람 모두 ‘노론’ 출신. 송시열과 송준길의 글씨인 양송체(兩宋體)에 영향을 받았다고 함.
  • 사약을 받아 숨지는 것을 수명(受命)이라 한다.
  • 꽃잎이 장식된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올리고, 처마가 위로 솟아 있는 형태의 머릿돌을 올렸다. -> 비 외관에 대한 설명 있는 곳이 없음. 추가할 것인지 검토 필요.


참고 자료

https://blog.naver.com/jcjkks/70173508602 : 비석 상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