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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이곡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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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9일 (화) 13:2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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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이곡의 묘
서천 이곡의 묘, 서천문화원.
대표명칭 서천 이곡의 묘
한자 舒川 李穀의 墓
주소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 10-1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6호
지정일 2010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서천 이곡의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서천 이곡의 묘는 묘는 종산에 다른 묘와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장대석으로 구획한 2단의 계체석에 의해 3구역으로 구분되는데 비탈에 자리한 반구형의 봉분 아래에 계체석이 바로 붙어 있음. 중단에 묘표석과 상석, 그리고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표석이 서 있음. 아래 계체석 위에 상석과 향로석이 위치하고 있음. 중앙의 묘표석에는 가정(嘉靖) 병술(1526)에 세워졌고, 우측에 서 있는 묘표석은 선덕 3년(1429)에 세웠는데, 후대에 후손이 덧새겼음.

이곡은 려말선초의 인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 도입과도 밀접한 인물이며 역사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주변에 이곡을 제향한 문헌서원이 있는 등 관련 유적과 연관하여 지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크다.

수정 국문

초고

고려 말의 문신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묘이다.

그의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가 있고, 왼편에 향로석,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비가 있다. 중앙의 묘비는 1526년 후손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오른쪽의 묘비는 그보다 앞선 1429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는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실력을 인정받아 원나라와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여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성리학의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 성리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는데, 당시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가 지은 시 가운데 100여 편 가까운 작품들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가전체 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한 「죽부인전(竹夫人傳)」과 그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해지고 있다.

1차 수정

고려 말의 문신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묘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가 있고, 왼편에 향로석,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비가 있다. 오른쪽의 묘비는 1429년에 세워진 것이고, 중앙의 묘비는 1526년 후손에 의해 새로 세워진 것이다.

이곡은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원나라와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원나라 조정에 건의하여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이념으로써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으나, 당시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 정권에서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곡이 지은 시 가운데 100여 편 가까운 작품들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가전체 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한 「죽부인전(竹夫人傳)」과 그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