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천 이곡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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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서천 이곡의 묘는 묘는 종산에 다른 묘와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장대석으로 구획한 2단의 계체석에 의해 3구역으로 구분되는데 비탈에 자리한 반구형의 봉분 아래에 계체석이 바로 붙어 있음. 중단에 묘표석과 상석, 그리고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표석이 서 있음. 아래 계체석 위에 상석과 향로석이 위치하고 있음. 중앙의 묘표석에는 가정(嘉靖) 병술(1526)에 세워졌고, 우측에 서 있는 묘표석은 선덕 3년(1429)에 세웠는데, 후대에 후손이 덧새겼음.
이곡은 려말선초의 인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 도입과도 밀접한 인물이며 역사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주변에 이곡을 제향한 문헌서원이 있는 등 관련 유적과 연관하여 지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크다.
수정 국문
초고
고려 말의 문신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묘이다.
그의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가 있고, 왼편에 향로석,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비가 있다. 중앙의 묘비는 1526년 후손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오른쪽의 묘비는 그보다 앞선 1429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는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실력을 인정받아 원나라와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여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성리학의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 성리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는데, 당시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가 지은 시 가운데 100여 편 가까운 작품들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가전체 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한 「죽부인전(竹夫人傳)」과 그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해지고 있다.
1차 수정
고려 말의 문신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묘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가 있고, 왼편에 향로석,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비가 있다. 오른쪽의 묘비는 1429년에 세워진 것이고, 중앙의 묘비는 1526년 후손에 의해 새로 세워진 것이다.
이곡은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원나라와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원나라 조정에 건의하여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이념으로써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으나, 당시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 정권에서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곡이 지은 시 가운데 100여 편 가까운 작품들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가전체 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한 「죽부인전(竹夫人傳)」과 그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해지고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고려 말 문신 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 본관 ;한산)의 묘이다.
- 이곡은 고려 말 성리학 도입에 기여하였으며, 묘소 주변에는 그를 제사지내는 문헌서원이 있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1332년(충숙왕 복위 2) 과거에 급제한 뒤, 원나라와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원나라에 공녀 징발을 반대하는 건의를 하여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고려 말 집권 세력이 받아들이지 않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 이곡이 지은 시 가운데 100여 편 가까운 작품들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동식물을 의인화한 가전체 문학 「죽부인전(竹夫人傳)」과 문집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하고 있다.
- 종산에 다른 묘와 함께 큰 묘역을 이루고 있으며, 앞에는 재실이 있다. 장대석으로 구획한 2단의 계체석(階砌石, 상석을 경계로 상·하단을 구분하기 위해 봉분 아래에 설치한 돌)에 의해 3구역으로 구분된다. 봉분 앞에 상석과 묘비가 있고, 왼편에 향로석,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비가 있다. 오른쪽 묘비는 1429년(세종 11)에 세워졌으며, 중앙의 묘비는 1526년(중종 21) 후손에 의해 새롭게 세워진 것이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서천 이곡의 묘(舒川 李穀의 墓) → 이곡 묘소(李穀 墓所)
- 수정이유: 문화재 자료로 등록된 정식 명칭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며, 지명을 밝힐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함. 앞의 “최석정 묘소”을 참고할 때 이 또한 묘소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정식 명칭이 ‘이곡의 묘’라면 그것을 따라야 하겠음.
- 고려 말의 문신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묘이다. → 고려 말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곡(李穀, 1298~1351)의 묘이다.
- 수정이유: 밑에서 이곡의 글을 강조한 것을 고려한다면, 문장가였다는 사실을 먼저 제시할 필요 있음.
-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해지고 있다. →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말의 학자 겸 정치가인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 수정이유: 시민들이 잘 알고 있는 이색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됨. 그 사실을 기입할 위치는 달리 판단해도 좋겠음.
- 서천 이곡의 묘(舒川 李穀의 墓) → 이곡 묘소(李穀 墓所)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원나라 조정에 건의하여(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원나라 조정에 건의하여 -> 원나라 조정에 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여)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이념으로써(성리학의 이념으로써 -> 성리학을 이념으로)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으나, 당시 쇠망의 양상을 보인(당시 쇠망의 양상을 보인 -> 쇠망에 들어선) 고려 귀족 정권에서는(고려 귀족 정권에서는 ->고려 귀족 정권의 한계로)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2차 수정
고려 말의 학자이자 문신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 1298~1351)의 묘이다.
이곡은 고려의 마지막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133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원나라와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원나라 조정에 고려로부터 공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여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고려 말 집권 세력이 받아들이지 않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곡이 지은 시 가운데 100여 편 가까운 작품들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동식물을 의인화한 가전체 문학 「죽부인전(竹夫人傳)」과 그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하고 있다.
종산(宗山)에 다른 묘와 함께 큰 묘역을 이루고 있으며, 묘역 앞에는 재실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가 있고, 왼편에 향로석, 오른편에 또 하나의 묘비가 있다. 오른쪽의 묘비는 1429년에 세워졌으며, 중앙의 묘비는 1526년 후손에 의해 새로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