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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화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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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0월 17일 (토) 04: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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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화계사
Hwagyesa Temple, Seoul
대표명칭 서울 화계사
영문명칭 Hwagyesa Temple, Seoul
한자 서울 華溪寺
주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화계사길 117



해설문

국문

화계사는 고려 광종(949~975) 때 왕사(광종 19년)와 국사(광종 25년)를 지낸 법인탄문 대사가 지금의 화계사 인근의 부허동에 창건한 보덕암을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선사가 서평군 이공과 협의하여 남쪽 화계동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 개명하였다. 신월선사는 화계사를 가리켜 ‘꽃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다워 세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하였으며, ‘흰 돌, 맑은 내, 꽃향기가 가득 하다(白石淸溪華香滿)’라고도 하였다.

광해군 10년(1618) 9월에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도월선사가 덕흥대원군 가문의 시주를 받아 1619년에 *중창하였다. 수백 년이 지나 쇠락하여 보전하기 어려워진 사찰을 고종 3년(1866년)에 대덕 용선과 범운 스님의 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대방과 요사채를 **중수하였다. 이에 전각 곳곳에는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들이 남아 있다. 이후 대덕 용선과 초암 스님이 1870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876년에 관음전을 중창하고, 1878년에 시왕전을 중수하였다. 이 무렵 조대비와 상궁들이 자주 출입하여 사람들이 ‘궁절’이라고 불렀다.

1933년에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절에 이희승, 최현배 등 한글학자 약 10여명이 화계사 보화루에 숨어들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 해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숭산 행원(1927~2004) 선사가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국가에 선원을 설립하고 포교에 힘써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외국인이 화계사를 찾아오게 되었고, 한국불교에서 화계사는 해외 포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중창: 낡은 건물을 고쳐서 다시 새롭게 지음
  • 중수: 낡은 건축물 따위를 다시 손질하여 고침

영문

영문 해설 내용

화계사의 역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900-975)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에 지은 보덕암이라는 암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의 승려인 신월선사가 1522년 이 암자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화계사라는 이름은 ‘꽃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다워 세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618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중종(재위 1506-1544)의 일곱째 아들이자 선조(재위 1567-1608)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1530~1559) 가문의 도움으로 1619년에 다시 지었다. 이후 사찰이 점차 쇠락해지자 고종(재위 1863-1907)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0~1898)의 시주를 받아 1866년에 중수하였다. 1870년에 대웅전을, 1876년에 관음전을, 1878년에 시왕전을 중수하였으며, 이 무렵 헌종(재위 1834-1849)의 어머니인 신정왕후(1808-1890)와 상궁들이 자주 출입하여 사람들이 ‘궁절’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는 한글학자 10여 명이 화계사 보화루에 숨어들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화계사는 해외 포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 해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숭산 행원(1927-2004) 선사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선원을 설립하고 포교에 힘쓰다가 1994년 화계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후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외국인이 화계사를 찾아오게 되었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보물 제11-5호)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2호)을 비롯한 다수의 성보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