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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앞에 있는 소나무도 ‘반송’이라고 부른다.
 
*사랑채 앞에 있는 소나무도 ‘반송’이라고 부른다.
*집을 지은 사람이 동생 김정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고(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내용으로 보임), 김빈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보는 자료도 있어(현제 제시된 기존 국문) 확인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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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은 사람이 동생 김정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고(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내용 및 문화재청 제공 문안), 김빈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어(현제 제시된 기존 국문) 확인 필요.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측면이 보이며, 안채는 사랑채 앞 쪽문을 통과해야만 진입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낮은 담으로 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측면이 보이며, 안채는 사랑채 앞 쪽문을 통과해야만 진입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낮은 담으로 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2021년 8월 15일 (일) 13:45 판


반송재 고택
반송재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반송재 고택
한자 伴松齋 故宅
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462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2호
지정일 1992년 7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반송재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반송재 고택은 조선 시대 문신 갈천(葛川) 김빈(金賓灬, 1621~1694)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선 숙종 6년(1680) 경에 처음 세웠다.

210여년 뒤 구한말의 대신 이유인이 99칸 대저택을 지으려고 2,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할 때 그 땅에 있던 갈천 고택도 함께 사들였다. 갈천 고택은 고종 36년(189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이유인의 동생인 이유직(李裕直)이 살았다. 그 후 1940년 김빈의 아우인 반송헌 김정(伴松軒 金貞灬)의 10대 주손 김환명(金煥明)이 이를 되찾아 반송헌의 종가로 삼으면서 ‘반송재’라 이름 붙였다.

고택의 전체적인 구조는 튼‘ㅁ’자형으로,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사랑채를 남쪽으로 두고 곳간채는 동쪽으로 두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사랑채는 정면 5칸 반,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 가운데 있는 2칸의 대청은 앞에 장지문* 네 짝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다. 각 방의 여러 종류의 창호 형식, 창문틀의 구조 수법 등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반송재 고택은 영남 북부 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와 평면 구성법을 지니고 있어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


  • 장지문(障紙門): 연이어 있는 방 또는 방과 마루 사이에 있는 미세기 문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빈(1621-1694)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 거주했던 살림집으로, 1680년 무렵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이후 1898년 법부대신을 역임한 이유인(?-1907)이 금당실 마을에 저택을 짓기 위해 땅을 사들이면서 집을 함께 사들여 189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으며, 이유인의 동생인 이유직이 이 집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1940년 김빈의 동생인 김정(호 반송헌)의 후손 김환명 집을 되찾은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올린 대문채는 담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등 경상북도 지역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 평면 구성을 보여 준다.

  • 사랑채 앞에 있는 소나무도 ‘반송’이라고 부른다.
  • 집을 지은 사람이 동생 김정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고(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내용 및 문화재청 제공 문안), 김빈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어(현제 제시된 기존 국문) 확인 필요.
  •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측면이 보이며, 안채는 사랑채 앞 쪽문을 통과해야만 진입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낮은 담으로 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참고자료

  • 예천의 고택, 반송재 고택(伴松齋 故宅), 겨울섬, 개인 블로그, https://gotn.tistory.com/1134 -> 내부 사진 상세 / 반송재는 조선 숙종때 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낸 갈천 김빈의 동생 김정이 1670~1690년경에 지은 집이며, 김빈은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말년을 이 곳에서 보냈는데, 한말에 가세가 기울어진 그의 자손들이 집을 팔려고 내놓자,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이유인(李裕寅)이 매입하여 189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습니다. / 담장 안에 있는 안채와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하였고 곳간채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사랑채 앞에 담장과 연결된 대문채가 있는데,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예천 여행] 반송재 고택, 어제와 다른 오늘을 꿈꾸며,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daumigi/221173007061 -> 현장 안내판 사진.
  • [박종인의 땅의 歷史] 예천 금당실 솔숲에 숨은 근대사의 비밀 [168] 나라를 가지고 놀았던 법부대신 이유인의 일생, 조선일보, 2019.06.12.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12/2019061200064.html -> 이유인 생애 및 금당실 정착 과정 / 금당실은 임진왜란 전 남사고(南師古)가 십승지 가운데 하나라 부른 곳이다. 금당실은 아름답다. 뒤로 오미산이 한가롭고 사방으로 들판이 기름지다. 금당실에서 이유인은 '양주대감'이라 불린다. 1901년 이유인은 경북관찰사로 임명됐다. 1899년 아들 이소영이 예천군수로 임명돼 있었다. 이소영 고향이 예천이니, 이는 연고지를 피해야 하는 조선 법 '상피제(相避制)'에 어긋난다. 특혜인사를 강행한 데는 특수한 목적이 있었을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금당실 아흔아홉 칸 저택 신축이었다.(김봉균, '예천지명 유래', 예천문화원, p360) 품삯 한 푼 안 주고 이유인은 대궐 같은 집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