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화산영당
목차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정규한(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제자와 유생들이 순조 32년(1832)에 세운 사당이다.
정규한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호는 화산(華山) 또는 운수산인(雲水山人)이다. 정조 4년(1780)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였다.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고 시문을 즐겨 문장가로도 유명하였으며 저서로는 <화산집>이 있다. 사당 뒤쪽에 묘소가 있다.
유림들은 1962년 사당을 중수하면서 화산영당의 명칭을 화산사(華山祠)로 개칭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영당은 영정(影幀)을 모셔 둔 사당이다. 계룡면 화은리에 위치한 화산영당은 조선후기 공주를 대표하는 문장가 정규한(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순조 32)에 건립된 사당으로, 정규한의 자인 화산(華山)에서 이름 붙여졌다.
정규한의 영당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도학을 숭모하였던 지역 사림들이 청원함에 따라 그의 고향에 창건되었다. 영당의 건립은 정규한이 생전 화산 아래에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짓고 학문을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 영당이 건립된 후에는 1835년 묘비 건립, 1858년 사헌부지평 증직 등 일련의 추숭 활동이 이어졌다. 영당은 건립 후 40여 년이 지난 1871년 1차 중수, 1931년 2차 중수, 1953년과 1961년 재차 중수되었고, 1962년 후손들에 의해 화산영당의 명칭이 화산사(華山祠)로 개칭되었다. 안타깝게도 정규한의 영정이 1970년대 초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로 대신하여 모시고 있다. 사당의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정규한은 공주를 대표하는 학자로 1780년(정조 4)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정규한은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1790년(정조 14) 성균관시에서 정조가 직접 정국의 상황과 계책을 묻는 질문을 하였는데, 당시 정규한의 대답이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795년(정조 19)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고시(古詩) 부분 중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자백선』을 하사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화산집>이 있다.
초고 수정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공주 지역의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자백선』을 하사받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영당은 정규한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순조 32(1832)에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1962년에 화산사(華山祠)로 개칭되었다. 건물의 이름은 정규한의 호를 딴 것이다.
1970년대 초에 영정을 도난당해 안에는 위패가 대신 모셔져 있으며, 이곳에서는 매년 가을에 제사를 올린다.
사당의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1차 수정
화산영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순조 32년(1832)에 건립된 사당이다. 안타깝게도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 사당 안에는 위패가 대신 모셔져 있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영당은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사당의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소가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큰 영광으로 여겼다. - 이후 여러 차례 중수(설명 : 낡고 헌 건물을 손질하여 고침)되었다.
-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 분야별 자문위원 2
안타깝게도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그가 지은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수와 자연(산수와 자연은 중복된 의미임)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영당은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보수되었다. 사당의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소가 있다.
-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수와 자연(산수와 자연은 중복된 의미임)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2차 수정
화산영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순조 32년(1832)에 건립된 사당이다.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 사당 안에는 위패가 대신 모셔져 있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그가 지은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영당은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사당의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