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봉황각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수정 국문

초고

봉황각(鳳凰閣)은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천도교의 수도원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1912년에 건립하였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킨 곳으로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불렀다.

손병희는 1906년 기존의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활동 이외에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는데, 1919년 발발한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33인 가운데서도 수장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심어주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이 집을 지었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했으며, 이곳을 거쳐간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이 건물의 이름인 ‘봉황’은 천도교의 교주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낱말을 딴 것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쓴 것이다. 봉황각에서 마주보이는 전면 약 50m 되는 산 언덕에는 손병희의 묘가 있으며, 이곳과 천도교회관에는 당시의 유품이 남아 있다.

1차 수정

봉황각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천도교의 수도원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1912년에 건립하였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킨 곳이며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불렀다.

손병희는 1906년 기존의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하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종교적인 활동 이외에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으며,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봉황각을 지었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했으며, 이곳을 거쳐 간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봉황각’이라는 이름은 천도교의 교주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건물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서화가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썼다. 봉황각 맞은편 언덕에는 손병희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