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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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 Changnyeolsa Shr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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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창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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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hangnyeolsa Shrine |
한자 | 彰烈祠 |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금사남로 78(금사리 519) |
지정(등록) 종목 | 시도기념물 제22호 |
지정(등록)일 | 1979년 12월 19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536㎡ |
웹사이트 | "창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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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영문
Changnyeolsa Shrine
In the late 19th century, most shrines were shut down by a nationwide decree, but this shrine survived as it was regarded as a symbol of loyalty.
The entire shrine consists of a lecture hall area in the front and a shrine area in the back, separated by a wall with an inner gate.
영문 해설 내용
창렬사는 조선 중기 문신 윤집(1606∼1637), 오달제(1609∼1637), 홍익한(1586∼163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 세 사람은 청나라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재위 1623-1649)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 이들은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17년 사당이 세워졌고, 1721년에는 경종이 ‘창렬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19세기 후반, 사우철폐령으로 전국의 거의 모든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이 사당은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져 살아남았다.
앞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이 있고, 뒷쪽에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 강당 출입문이 뒷면에 있는 점이 특징이다.
참고
- “서원의 등장과 전개”,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병자호란과 3학사의 충절이 모셔진 부여 창렬사", 충청남도 미디어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