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사정
금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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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금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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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社亭 |
지정(등록) 종목 |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 |
해설문
국문
금사정은 조선 시대 나주 사림파의 행보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중종 14년(1519)에 발생한 기묘사화 때 나주 출신의 신진 사류였던 정자 임붕(正字 林鵬), 사예 나일손(司藝 羅逸孫) 등 11인은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당시 임붕은 성균관 생원으로서 유생 240여 명을 대표하여 상소하였고, 생원 정문손(鄭文孫)이 지은 신원소(伸寃疏)는 조광조의 운집에 실려 있다.
임붕 등 11인은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좌절되고, 무고한 이들이 화를 당하는 암울한 시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금사정을 짓고 ‘금강계(錦江契)’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금강계 11인은 금사정 앞에 변치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동백나무를 심었는데 500년이 넘은 지금까지 남아 선비의 기상을 꽃피우고 있다.
- 금강계 11인: 나주인 정자 임붕(羅州人 正字 林鵬), 나주인 사예 나일손(羅州人 司藝 羅逸孫), 당악인 유학 김두(棠岳人 幼學 金㪷), 당악인 우후 김구(棠岳人 虞候 金臼), 하동인 유학 정문손(河東人 幼學 鄭文孫), 광산인 생원 김식(光山人 生員 金軾), 여양인 유학 진이손(驪陽人 幼學 陳二孫), 여양인 유학 진삼손(驪陽人 幼學 陳三孫), 여양인 유학 진세공(驪陽人 幼學 陳世恭), 김해인 유학 김안복(金海人 幼學 金安福), 나주인 유학 정호(羅州人 幼學 鄭虎)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금사정은 조선시대 나주 출신의 문신과 학자 11명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16세기 조선에서는 조광조(1482-1519)라는 문신이 부패한 관리를 질타하고 잘못된 제도를 없애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정적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1519년 사화 때 역모를 꾀한다는 누명을 쓰고 사사되었다. 당시 성균관 생원이었던 임붕(1468-1553)을 비롯한 유생 240여 명이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주 출신의 임붕 등 11명은 개혁 정치가 좌절되고 무고한 이들이 화를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계를 조직하여 활동하며 이 정자를 지었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5년에 재건하고 1869년에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새로 지었다.
정자 앞에 변치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나무는 금사정을 지은 11명이 지조를 지킬 것을 다짐하며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200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참고: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참고자료
- “성균관 생원 임붕 등 240여 인이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하다”,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1월 17일 정미 5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411017_005
- “생원 임붕 등이 상소하여 옥에서 대명하겠다고 청하다”,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1월 17일 정미 1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411017_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