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관(삼척도호부 관아지)
진주관 眞珠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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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판: 삼척도호부 관아지 |
해설문
국문
진주관(眞珠觀)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삼척도호부 관아 안에 있는 객사의 중심 건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을 치르던 공간이다. 각 고을의 객사는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삼척도호부 관아의 객사가 진주관인 것은 삼척의 옛 이름이 진주(眞珠)였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건물 이름에 객사를 뜻하는 한자인 ‘객사 관(館)’이 아니고 ‘볼 관(觀)’을 썼다는 것이다. 아마도 삼척도호부 관아와 객사가 있는 장소가 오십천(五十川)과 죽서루(竹西樓), 응벽담(凝碧潭) 등이 가까이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삼척도호부 관아의 객사는 원래 죽서루 밑에 있었으나, 1517년(중종 12)에 부사 남순종(南順宗)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진주관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고치고 다시 짓는 과정을 거쳐 왔다. 1908년부터는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삼척군청 건물로 사용되었다가 1911년에는 진주관에 있던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강원도청으로 옮기게 되었다. 1934년에 삼척도호부 객사의 목조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조적조***의 삼척군청 건물을 새롭게 지었다. 이후 1982년 삼척군청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삼척시는 2010년부터 문화재청으로부터 지원받아 삼척도호부 관아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근거로 하여 객사인 진주관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궐패(闕牌): 조선 시대에, 중국 황제를 상징한 ‘闕’ 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패.
-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패. 공무(公務)로 간 관리나 그 고을 원이 절을 하고 예(禮)를 표시하였다.
- 조적조(組積造): 돌, 벽돌, 콘크리트 블록 등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 구조.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했다. 객사는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청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숙소로 사용되던 익헌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진주관은 삼척도호부 관아의 객사이다. 진주관이라는 이름은 삼척의 옛 이름이 진주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일반적으로 객사의 이름에 쓰이는 ‘관’은 한자로 집 또는 건물을 나타내는‘館’을 쓰는데, 이 건물의 이름에서는 ‘볼 관(觀)’을 썼다. 아마도 삼척도호부 관아와 객사가 있는 장소가 오십천과 죽서루 등이 가까이 있어 경관이 빼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척도호부 관아의 객사는 원래 죽서루 남쪽에 있었으나, 1517년에 부사 남순종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진주관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고치고 다시 짓는 과정을 거쳐 왔다. 1908년부터는 삼척군청 건물로 사용되었고, 1911년에는 진주관에 있던 전패를 강원도청으로 옮겼다. 1934년 진주관을 헐고 그 자리에 벽돌과 콘크리트로 쌓은 건물을 새롭게 지었다. 이후 1982년 삼척군청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삼척시는 2010년부터 삼척도호부 관아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여러 차례 진행하였고, 조사 결과를 근거로 하여 2022년 진주관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