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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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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 효자비
대표명칭 조형 효자비
한자 趙珩 孝子碑



해설문

국문

효자 조형은 조선시대 세종조의 사람으로 천성이 어질고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서 다하였다. 공은 세종7년(1425) 문과에 급제하여 이 후 벼슬이 사재감(궁중에서 사용하는 어류, 육류, 소금, 연료, 횃불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기관)의 부정(종3품의 품계를 가진 벼슬로 성부전의 부책임자)에 올랐으며,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여 늘 기쁘게 해 드렸다고 한다.

공이 합천군수로 있을 때 주민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은어를 잡아 드렸으나 사사로이 관청에 들이지 못하게 하는 등 모든 일을 이와같이 하여 청백리라고 불렀으며, 이 후 하루는 몸에 땀이 흐르고 마음이 놀라서 그 길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오던 중 소야천에 당도해 보니 물이 넘치고 배가 없어 건너지 못하고 마음만 조이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공을 등에 태워 건네 주었다고 한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시에는 “길 좌측에 효자비가 있으니 성과 관직이 적혀 있네. 공의 효행을 비 앞에 서서 가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발만 구르누나!”라고 하여 공의 효행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여막을 짓고 어머님을 생각하여 피눈물로 3년을 지냈으며, 조부모상 때에도 또한 그렇게 하면서 내내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공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세조께서는 특별히 명하여 정려를 내렸으며, 동국여지승람 등에 그 내용이 적혀있는 이 비는 본래 마원3리 마을입구에 서 있던 것을 1993년 이곳으로 옮겨서 정비해 놓았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