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대교
한강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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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한강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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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江大橋 |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302-11 등 20필지 |
지정(등록) 종목 |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재 제1호 |
지정(등록)일 | 2020년 9월 10일 |
분류 | 등록문화재/기타/공공용시설 |
시대 | 일제강점기 |
수량/면적 | 교량(구교 부분) 1기 |
웹사이트 | 한강대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한강대교는 동작구 본동과 용산구 한강로를 연결하는 최초의 한강 인도교로 제1한강교라고 불리었다. 이곳은 중지도(노들섬)까지 백사장이 이어져 있으며 강폭이 좁고 물살이 약하여 통행하기 좋아 노들나루가 있던 곳이다. 정조1776-1800 재위가 능으로 행차할 때 배다리를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한강인도교는 1912년 민간인의 영업차가 들어오면서 조선총독부가 인도교 계획을 세우고 1917년 10월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노량진과 중지도를 잇는 440m의 대교大橋와 중지도와 용산을 잇는 188m의 소교小橋로 나누고, 중앙차도 폭을 4m, 좌우 보도 폭을 각각 1m로 만들었다. 이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소교 부분이 무너져 통행이 막혔으나, 1929년 소교 폭을 18m로 확장하여 재개통하였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도교가 폭파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1957년 배다리를 가설하는 임시 복구를 시작으로 1958년에 한강인도교는 새로운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인구와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다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81년 다리의 폭을 2배로 늘려 4차선을 8차선으로 확장하고 이름을 한강대교로 바꾸었다.
한강대교는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한강다리로,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어 전쟁의 참상을 되새기게 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산 증거이다. 또한 우리나라 교량 기술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징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1917년에 준공된 한강대교는 노들섬을 가로질러 동작구 본동과 용산구 한강로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한강 최초의 인도교로 제1한강교라고도 불렸다. 노들섬 남쪽 구간은 2020년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한강대교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의 나루터인 노들나루가 있던 곳이다. 강변에서 노들섬까지 백사장이 이어져 있고 강폭이 좁고 물살이 약해 통행하기 좋았다. 정조(재위 1776-1800)는 한강을 건널 때, 이곳에 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판재를 덮어 만드는 배다리를 놓기도 하였다.
민간 차량이 거의 없던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강을 자동차로 또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없었다. 1912년 민간용 차량이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인도교 수요가 증가하였고 드디어 1917년 한강대교가 완성되었다. 처음 한강대교는 노들섬과 남쪽의 노량진을 잇는 440m의 대교(大橋)와 노들섬과 북쪽의 용산을 잇는 188m의 소교(小橋)로 이루어져 있었고, 중앙차도 폭을 4m, 좌우 보도 폭을 각각 1m로 만들었다. 1925년 대홍수로 소교가 무너진 후, 1929년 소교 폭을 18m로 확장하여 다시 지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일부 폭파되었지만, 1957년 재건공사에 착수하여 1958년에 준공하였다. 이후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인구와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다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81년 다리의 폭을 2배로 늘려 4차선을 8차선으로 확장하였다.
한강대교는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한강다리 중 하나이며, 한국의 현대 교량 기술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징물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어 전쟁의 참상을 되새기게 하는 근현대사의 산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