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백당 종택
보백당 종택 |
|
대표명칭 | 보백당 종택 |
---|---|
한자 | 寶白堂 宗宅 |
주소 | 경북 안동시 길안면 충효로 1736-5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 |
지정(등록)일 | 1980년 6월 1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3동1식 |
웹사이트 |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 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종택은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가리킨다. 보백당 종택은 조선 시대 문신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의 종택이다.
김계행은 소산 마을에 처음 정착한 김삼근의 둘째 아들이다.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로 불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지냈다. 대사간일 때 연산군의 폭정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자 안동으로 돌아와 소산리 사제에 보백당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보백당이라는 명칭은 김계행의 생활 철학인 시구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이란 오직 청백뿐이다)”에서 따온 것이다.
김계행은 평소 이곳의 풍경을 즐겨 자주 방문하였다. 성종 6년(1475) 장남에게 이곳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1501년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은거하게 되면서 마을 이름을 묵계(黙溪)라고 하였다. 종택은 상리 마을에 있었으나, 후대에 모두 불타면서 근처의 고란리로 옮겼다가 1800년대 후반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종택은 중심이 되는 집인 口 자형의 정침, 사당, 사랑채인 보백당,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전쟁으로 종택의 정침 일부가 불탔으나, 1958년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 "장남에게 '이곳에' 자리잡게 하였다"고 했는데, '이곳'이 어디인지? 보백당에 자리잡게 한 것으로 읽히는데, 보백당이 지어진 것은 김계행이 연산군 때 고향에 돌아온 이후이므로 1475년이라는 시기와 맞지 않음.
영문
Bobaekdang Head House
Bobaekdang Head House is the residence passed down among the male successors of the family lineage of Kim Gye-haeng (1431-1517, pen name: Bobaekdang),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Kim Gye-haeng was the second son of Kim Sam-geun (1390-1465), the first person of the Andong Kim Clan to settle in Sosan Village.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480 and served several official posts. He made every effort to stop the violent rule of King Yeonsangun (r. 1494-1506), but was unsuccessful. So, in 1498, he returned to Andong, where he taught his students. The name Bobaekdang means “House of Treasured Integrity” and comes from Kim Gye-haeng’s life philosophy that “There are no treasures in our house. The only thing considered a treasure is integrity.”
The house consists of a gate quarters, a square-shaped living quarters with an inner courtyard, a men’s quarters, and a shrine. The house was originally located in the nearby Sangni Village, but it was rebuilt in its current location in the late 1800s after it had burnt down.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the living quarters was partially damaged in a fire and was rebuilt in 1958.
영문 해설 내용
보백당 종택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계행(1431-1517, 호: 보백당) 가문의 종손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김계행은 안동김씨 가운데 소산마을에 처음 정착한 김삼근(1390-1465)의 둘째 아들이다. 1480년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지냈다. 연산군(재위 1494-1506)의 폭정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자, 1498년 안동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김계행의 생활 철학인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로 여기는 것은 오직 청백이다’라는 시구에서 따왔다.
김계행 가문의 종택은 대문채, ‘ㅁ’자형의 정침,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상리마을에 있었으나, 후대에 모두 불탔고, 1800년대 후반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정침 일부가 불탔으나, 1958년 지금의 건물을 다시 지었다.
참고자료
- (안건번호 민속 2016-04-28) 28. 안동 보백당 종택 지정 검토, 『2016년도 문화재위원회 제4차 민속문화재분과 회의록』, 문화재위원회, 2016.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8329&bbsId=BBSMSTR_1019&mn=NS_03_03_04
- 최은주, 『(경북의 종가문화)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 종가』, 예문서원, 2012, 96~102쪽. -> 종택은 대문간인 행랑채, 사랑채, 안채, 가묘, 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 처마 밑에는 묵은재와 용계당이라는 편액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데, 모두 동농 김가진(1846~1922)의 글씨이다. 용계는 8대 종손 김중망의 호이다. 사랑채 옆에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정면에는 안방이, 오른쪽에는 부엌이 위치한다. 사랑채와 안채는 ㅁ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에서 나와 오른편으로 돌아보면 별채인 보백당이 서 있다. 보백당은 좌측에 4칸 대청과 우측에 2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 아래에 ‘보백당’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역시 김가진의 글씨이다. 종가에서는 보백당을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청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15대종손 김학규가 묵계로 종택을 옮기면서 집안에 보백당을 건립했던 뜻과 부합한다. 가묘는 대문에서 본채를 바라보고 섰을 때 그 왼편 뒤쪽에 위치한다. 삼문을 가운데로 한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내부에는 정면 뒤쪽 벽체에 공간을 만들고 문을 낸 벽감 형태의 신주 감실을 설치하였다. / 4대봉제사는 종손이 거주하는 대구에서 지내고 명절 차례는 가묘에서 지내며, 불천위 제사(김계행)는 보백당에서 지낸다.
- [종가] 10. 안동 보백당 김계행 선생 종가, 경북일보, 2016.3.20.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4046 -> 보백당 김계행 선생은 조선 전기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 3사의 요직과 성균관 대사성을 거치면서 당대 거유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덕망을 받아온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불리고 있다. 선생은 후세에 유림들에 의해 묵계서원에 제향됐다. /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은 "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은 오직 청백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보백당이라는 당호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 보백당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은 6·25전쟁 때 건물 대부분이 불타고 사당과 사랑채 '보백당'만 남았다. 현재의 다른 건물은 그 후에 다시 지었다. '보백당' 건물은 제청으로 사용된다. 불천위 교지는 1909년에 내려왔지만, 그 전부터 불천위 제사는 지냈다는 것이 차종손 김정기씨(1954년생)를 비롯한 후손들의 설명이다.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하) - 묵계종택과 서원, 영남일보, 2019.3.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90308.010360742120001 -> 보다 가까운 사랑채는 김계행의 호 ‘보백당(寶白堂)’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청백이 보물이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4칸 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으며 대청과 방 사이에는 불발기창이 있는 장지문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에 걸쇠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니 분합문일 게다. 한여름 문을 열면 대청은 활짝 넓어진다. 지금은 제청으로 사용되고 다양한 소모임 장소로도 대여된다. 김계행의 첫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1454년 묵계마을 남상치의 딸과 재혼했다. 원래 묵계마을은 의령남씨 세거지였다고 전해지는데, 아들이 없던 남상치가 사위인 김계행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외손봉사를 당부했다고 한다. 김계행이 묵계에 들어온 때는 1500년경이다. 김계행은 이곳에서 만휴정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고 그로부터 묵계마을은 안동김씨 세거지가 되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ㅁ’자형의 집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 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댓돌에 신발은 있지만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다. 용계당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툇마루는 공연무대로 이용되고 안채의 방은 숙박이 가능하다.묵계종택은 6·25전쟁 때 사당과 사랑채만 남고 모두 불탔다고 한다. 현재의 다른 건물은 그 후에 다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