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낙강정
안동 낙강정 |
|
대표명칭 | 안동 낙강정 |
---|---|
한자 | 安東 洛江亭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73-3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7호 |
지정(등록)일 | 2011년 6월 2일 |
분류 | 유적건조물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안동 낙강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낙강정은 조선 시대의 문신 권예(權輗)가 중종 36년(1541)에 지은 정자이다. 권예는 안동 출신으로 중종 11년(1516)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왕에게도 적극적으로 직언을 올렸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중종 33년(1538) 어머니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낙강정을 지어 자연을 즐기며 은거하였다.
원래의 건물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졌으나, 순조 6년(1806) 권예의 후손인 권당(權讜)과 권방(權訪) 형제가 선조의 행적을 기리며 정자를 다시 지은 후 후손들에 의해 몇 차례 고쳐 지어졌다.
정자 정면에는 낙강정 이름이 적힌 현판과 ‘판서연(判書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이 명종 원년(1546) 권예를 만나기 위해 낙강정을 방문하였을 때 권예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낙강정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판서연’이라 불렀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낙강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권예(1495-1549)가 1541년에 지은 정자이다.
권예는 안동 출신으로 1516년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왕에게도 적극적으로 직언을 올렸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153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왔고, 낙강정을 지어 자연을 즐기며 은거하였다.
원래의 건물은 세월이 흘러 무너졌고, 1806년 권예의 후손인 권당(1731-1812)과 권방(1740-1808) 형제가 선조의 행적을 기리며 정자를 다시 지은 이후 후손들에 의해 몇 차례 고쳐 지어졌다.
정자 정면에는 낙강정 이름이 적힌 현판과 ‘판서의 연못’이라는 뜻의 ‘판서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저명한 학자 이황(1501-1570)이 1546년 권예를 만나기 위해 낙강정을 방문하였을 때 권예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낙강정 옆을 흐르는 낙동강을 ‘판서연’이라 불렀다.
참고자료
- 황만기, 「마애 권예의 삶과 낙강정」, 『영남학』 60, 2017.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09814 -> 2011년 문화재 지정 이후 진입로를 정비했다. / 고향으로 낙향한 마애는 이후 10년 동안 현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에 낙강정을 건립하고 풍산읍 막곡리 청석산 성산사에서 은거하다가 1549년에 사망했다. / 마애에 의해서 건립된 낙강정은 오랜 세월 속에 무너지고 훼손되었다가 365년 뒤인 1806년에 그의 7대손인 초은(樵隱) 권당(權讜 1731~1812)과 학림(鶴林) 권방(權訪, 1740~1808) 형제에 의해 공수포(公須浦) 옛 터에 7칸으로 새롭게 중건되었다. 중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대계(大溪) 이주정(李周禎, 1750~1818)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특히 “정자가 오래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초려(草廬)가 아니라 와옥(瓦屋)의 형태로 지었으며 탁 트인 곳을 쫓아 언덕에서 고원지대로 옮겼으며, 여강서원의 제도를 본떠서 7칸으로 하였고, 도산서당의 규모를 모방하여 높이와 너비를 8자로 하였다.”라고 한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 이후 낙강정은 60년 뒤인 1865년(고종 2)에 9세손 권최(權寓最) 등이 여러 족손들과 함께 이건하였고, 또 70년 뒤인 1935년에 14세손인 권백원(權百源), 권도혁(權道赫) 등이 다시 중수를 한다. 또 50년 뒤인 1985년에는 수리시설통수지설(水利施設通水之洩)로 인하여 정자가 무너질 우려가 있어 권주혁(權柱赫)․권순창(權純昶)․권오성(權五成)․권상식(權相軾) 등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기로 합의하고 옛 터에서 백보 떨어진 곳에 이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17대손 낙강정보존회장인 권용주(權容柱)의 신청에 의해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같은 해 낙강정기적비(洛江亭紀蹟碑)도 함께 세워졌다. / 1546년 3월 16일에 퇴계가 이곳을 방문해 7언절구 한 수를 남겼다 (退溪集 續集 卷1, 「三月十六日 謁權判書江亭」.)
- 안동 낙강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5870000 -> 낙강정(洛江亭)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아담한 건물로 마애(磨厓) 권예(權輗) 선생의 정자이다. 안동권씨인 권예는 151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519년 己卯士禍때 조광조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전해진다. 원래는 예천에 있었던 정자를 이곳으로 이건하였다고 하며 당시의 이건기와 상량문이 있으나 자세한 연호를 기록하지 않아 확실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정자의 평면구성이 영양 서석지의 경정 및 봉화 도암정과 유사한 유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로서 전면 1칸은 누마루를 설치하고 주변에 계자난간을 둘러 열린 공간으로 조영되어 있어 특색이 있다. 『마애선생문집』등의 문헌기록이 남아있고 낙강정(洛江亭)·판서연(判書淵) 등의 현판이 현존하고 있어 당호가 확실하여 역사적·고건축적으로 가치가 있다.
- 안동 낙강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30002 -> 원래 경상북도 예천에 있었던 정자 건물로, 이곳으로 이건하였다는 이건기와 상량문이 있으나 자세한 연호를 기록하지 않아 확실한 연대는 알 수는 없다.
- (참고) 한국문집총간 해제 ; 『신암집』, 한국고전종합DB -> 저자 이만각(李晩慤, 1815-1874)은 退溪 李滉의 11세손으로, 일찍이 榮利의 뜻을 버리고 경전과 「朱書節要」를 깊이 연구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신암집』 권7에 수록된 〈洛江亭重建記〉는 학림 권방(權訪, 1740~1808)이 중수한 낙강정을 그의 후손 권최(權최) 등이 중건할 때 지은 것이다.
- (참고) 한국문집총간 해제 ; 『학림집』, 한국고전종합DB -> 연보에 따르면 문집의 저자인 권방은 1808년 낙강정 중수를 마친 후 그 해에 사망했음. 『학림집』권3에 수록된〈洛江亭十詠〉은 7대조 권예(權輗)가 만년에 은거했던 낙강정을 중수하여 1806년에 상량한 이후 3년 만에 낙성을 하고 그 주변의 십경을 노래한 것이다. 『학림집』권10에는 <낙강정중건상량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