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낙강정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문신 권예(權輗, 1495~1549)가 고향으로 돌아온 후 1541년 '강정(江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다고 한다.
권예는 조선 중종 11년(1516) 과거에 급제했으며, 1519년 사화가 일어났을 때 임금에게 직언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낙향하였고, 이후 죽을 때까지 이 마을에서 은거하였다.
처음 지어진 건물은 세월이 흘러 무너졌고, 그 터에 권예의 7대손인 권당(權讜, 1731~1812)과 권방(權訪, 1740~1808) 형제가 선조의 행적을 기리며 다시 지었다. 이후 후손들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985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경사가 있는 지형을 활용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전면에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내어 정자의 느낌을 더했다.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중 한 명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명종 원년(1546)에 낙향한 권예를 만나기 위해 이 정자를 찾기도 했다. 건물 전면 좌측에 걸려 있는 ‘판서연(判書淵)’ 편액은 당시 이황의 지었던 시에 등장하는 이름을 새긴 것이다.
- 건물 건립 및 이건에 대한 서술은 황만기의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음 (두 가지 내용이 있으므로 확인 필요)
1) 황만기 논문 : 1541년에 마애 권예가 상락공 김방경(1212~1300)이 무예를 익히던 상락대 남쪽 구석진 곳에 세운 정자로, 강정(江亭)이라 불렀다.
2) 문화재청 및 향토문화대전 원고 : 본래 경상북도 예천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건의 주체, 이유, 시기 등을 알 수 없고, 해당 자료에서 언급한 이건기 등은 황만기의 논문에서 제시한 19세기의 이건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임.)
1차 수정
낙강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권예(權輗, 1495~1549)가 중종 36년(1541)에 지은 정자이다.
권예는 안동 출신으로 중종 11년(1516)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왕에게도 적극적으로 직언을 올렸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중종 33년(1538)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왔고, 낙강정을 지어 자연을 즐기며 은거하였다.
원래의 건물은 세월이 흘러 무너졌고, 순조 6년(1806) 권예의 후손인 권당(權讜, 1731~1812)과 권방(權訪, 1740~1808) 형제가 선조의 행적을 기리며 정자를 다시 지은 이후 후손들에 의해 몇 차례 중수되었다.
정자 정면에는 낙강정 이름이 적힌 현판과 ‘판서연(判書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명종 원년(1546) 권예를 만나기 위해 낙강정을 방문하였을 때 권예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낙강정 옆을 흐르는 낙동강을 ‘판서연(判書淵)’이라 불렀다.
-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예천에 있던 정자를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근거를 확인하지 못함. 디지털안동문화대전에도 같은 내용이 언급되나 국가문화유산포털을 인용한 것임. 위 문안은 황만기의 논문 「마애 권예의 삶과 낙강정」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음. 또한 원래 위치에서 이건되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원래 위치가 어디인지 등이 확인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