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언 묘와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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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4월 4일 (월) 12: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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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언 묘와 묘표
청평군 한언 묘표, 경기문화재연구원.
대표명칭 한언 묘와 묘표
한자 韓堰 墓와 墓表
주소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계수동 산 3-15번지
지정번호 부천시 향토유적 제2호



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조선시대의 문신 한언(韓堰, 1448~1492)과 부인 밀양박씨의 무덤이 있는 묘역과, 묘역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한언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왕위에 오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동생 한명진(韓明溍, 1426~1454)의 아들로, 청주한씨 중 부천 지역에 처음 정착하였다. 예종 1년(1469)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성종 23년(1492) 45세의 나이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보호석을 두른 두 개의 봉분 중 왼쪽이 한언의 무덤이다.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1기,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1984년 문중에서 묘역 정화작업을 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고 한다.

묘역 왼쪽에는 묘표로 알려진 비석이 있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뿔이 없는 용을 새겨 장식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면에는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글씨[청평군한공지묘(淸平君韓公之墓)]를 새겼다. 현재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묘역에 세워져 있는 석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한언이 죽자 양국의 임금들은 그를 애도하며 관리를 파견해 유해가 조선으로 무사히 운구될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었다. 이때 파견된 중국의 관리가 묘역 조성에 쓰일 석물들을 함께 가져왔고, 이것이 현재 묘역에 있는 묘표와 문인석이라고 한다. 실제로 문인석의 복장은 중국의 복식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묘표 역시 비교적 작은 크기와 비석의 형태가 중국풍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한언 부부의 묘 위에는 경기도 양주에서 2008년에 이장해 온 한명진과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가 있다. 또, 아래쪽에는 도시 개발 과정에서 선영 보존을 위해 노력한 후손들에 의해 2013년 옮겨온 한준의 묘와 신도비(향토유적 제3호)가 자리하고 있다.

  • 한언의 아버지 한명진(1426~1454, 이양공)는 한명회의 동생이며, 양도공파의 중시조이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정난공신 3등에 책봉되었지만, 이듬해에 별세했다.
  • 한언의 운구를 책임졌다고 하는 중국 관리의 이름이 확실하지 않고(임전/임벽 등등), 아들 한홍윤도 부친의 유해를 운구하는 일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명은 생략하였음.

1차 수정

조선시대의 문신 한언(韓堰, 1448~1492)의 묘와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묘표이다. 묘표는 묘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리기 위해 세우는 비석으로, 죽은 이의 이름과 행적 등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다.

한언의 아버지 한명진(韓明溍, 1426~1454)은 형인 한명회(韓明澮, 1415~1487)와 함께 조선 제7대 왕 세조(1455~1468 재위)가 왕위에 오르는 데 이바지하여 공신이 되었다. 아버지의 공로로 한언은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길에 올랐지만, 예종 1년(1469) 진사시에서 장원급제하고 성종 5년(1474)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주요 관직을 지냈다. 성종 23년(1492)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언은 청주한씨 중 처음으로 부천 지역에 정착한 인물이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부천시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한언의 묘는 부인 밀양박씨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묘 앞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려놓는 향로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을 갖추었다.

묘표는 묘역 앞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용을 새겨 장식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면에는 ‘청평군한공지묘(淸平君韓公之墓)’라고 새겼다.

한언 묘역의 묘표와 문인석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한언이 죽자 명나라 황제와 조선의 임금은 그를 애도하며 유해가 조선으로 무사히 운구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이때 묘에 쓸 석물들을 한언의 유해와 함께 가져왔다고 한다. 실제로 문인석의 복장은 중국 복식에 가까운 모습이며, 묘표 역시 비교적 작은 크기와 비석의 형태가 중국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한언 부부의 묘 위에는 경기도 양주에서 2008년에 이장해 온 한명진과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가 있다.

영문

갤러리

참고자료

  • 청평군 한언 묘표,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s://gjicp.ggcf.kr/archives/artwork/청평군-한언-묘표 → 이미지 출처 /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계수동에 살았던 한언(韓堰, 1448~1492)은 본관은 청주, 자는 옥경(沃卿)이다. 한명진(韓明溍)의 아들이며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조카이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난 한언은 22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였고,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비석 위 부분에는 뿔없는 용이 서린 모양을 새긴 이수가 있으며 석재는 철분이 많이 포함된 대리석이다. 규모는 다른 신도비에 비해 아주 작은 편이다. 신도비의 규모가 작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1492년 여름 명나라 효종이 태자를 책봉하니 사신을 파견하여 경사를 축하하려 할 때 사은사로 선발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어머님이 연로하여 고사하였다. 그러나 오로지 다른사람의 어려움에 대해 피하지 않고 힘써 도리대로 행했던 한언은 결국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다가 9월 병환으로 중국 회동관에서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명나라 효종이 예부낭중 임전을 보내 제사를 올리고 관리를 파견하여 유해를 조선까지 호송하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임전이 유해를 모셔올 때 신도비와 문인석 등 묘역에 쓰일 물건도 함께 가져왔기 때문 문인석도 조선의 전통적인 양식이 아닌 중국식 복장을 한 중국 양식이다.
  • 부천 향토 유적 제2호인 한언 묘표에 다녀오다, 콩나물신문, 2019.1.29http://www.kong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190 → 청평군 한언 묘표가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예전에는 비각이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그만 묘표가 서 있었다. 그 묘표는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쇠파이프를 박아놓았다. 그 쇠파이프를 쇠줄로 연결해서 막아놓았다. 지금은 한언묘표가 비바람에 마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비각을 세워 놓았다. 일종의 보호각이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한언 묘표(墓標)는 우리나라 제품이 아니란 사실이다. 중국에서 물 건너 가져온 것이다. 중국산임에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과 비슷하다. 청평군 한언이 45세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기에 돌아가셨다. 그때 한언의 유해를 임전이라는 분이 모셔오면서 이 묘표도 함께 가지고 온 거다. / 묘표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묘표 위쪽에 이수(螭首)가 조각되어 있다. 이 이수는 뿔 없는 용이라는 뜻이다. 용에는 당연히 당당한 뿔이 있는데 이 이수는 뿔이 없어서 교룡(蛟龍)이라고도 한다. / 비의 몸인 비신에는 청평군한공지묘(淸平君韓公之墓)라고 뚜렷하게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청주한씨문열공파보(淸州韓氏文烈公派譜)’에도 ‘가선대부이조참판청평군한언묘표음기(嘉善大夫吏曹參判淸平君韓堰墓表陰記)’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이 비가 신도비가 아니라 한언의 묘임을 나타내주는 묘표(墓標)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한언 묘표를 신도비로 잘못 해석해서 여러 자료에 수록해 놓았다. 두산백과에는 묘표(墓表)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타당성을 얻고 있다고 하면서도 한언신도비라는 제목을 달았다. / 묘표는 돌아가신 분의 신분만 간단히 기록해서 세운 어찌보면 가장 단순한 형태의 비석이다. 후손들이 성묘 때마다 묘표에 새겨진 인물을 잊지 않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묘표를 세운 가장 큰 목적이다. 묘표 앞면에는 누구 묘인지 신원을 썼다. 청평군한공지묘(淸平君韓公之墓)가 그 증거이다. 뒷면에는 묘표가 건립된 그 연대를 새겼다. 묘의 주인의 생전 행적이 뚜렷하면 일정한 격식을 갖춰 신도비처럼 돌아가신 분의 생애를 약술(略述)하기도 했다. 이를 ‘묘표음기墓表陰記’라 했다. 한언묘표는 마모가 되어 읽을 수가 없다. 묘표에는 신도비처럼 상세하게 생애를 상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았다. 한언의 묘표음기가 남아 있는 것은 한언의 간단한 일대기를 기록했음을 증명한다. / 1492년 9월 2일에 질병으로 베이징 회동관(會同館)에서 돌아가셨다. 명의 황제가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벽(林壁)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관리를 보내어 호송하여 주었다. 한언의 아들인 한홍윤(韓弘潤)이 사자로 가서 관을 모시고 돌아왔다. 한언의 부음 소식이 알려지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며 의식대로 조제(弔祭)를 하라고 명하고, 특별히 인부를 보내어 장사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이해 11월 29일에 함박산의 당시 주소인 인천부(仁川府) 동면(東面) 황천리(黃川里) 계좌 정향(癸坐丁向) 터에 안장하였다.
  • 부천둘레길 6코스 범박동 순환길 – 3구간 함박마을길, 수명산의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twkimjan/222236725402 → 묘역, 신도비각 사진
  • 사은사 청평군 한언의 졸기, 『조선왕조실록』 성종 23년(1492) 10월 10일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310010_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