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이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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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이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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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안동 이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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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 怡老堂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마애길 85-13 (풍산읍, 이로당)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2호 |
지정(등록)일 | 2006년 9월 14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일원 |
웹사이트 | 안동 이로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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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로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문의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해군 4년(1612)에 처음 세웠다. 건물의 이름 ‘이로(怡老)’는 ‘노인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이돈은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고, 광해군 2년(1611)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당하자 사직한 후 귀향해 이로당과 산수정을 짓고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이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했으나,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건물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왼쪽 온돌방 뒷벽에는 벽장을 설치했고, 오른쪽 온돌방 앞의 툇마루가 대청과 연결된다.
건물이 자리한 마애리는 진성이씨 중 안동에 처음 들어 온 이자수(李子修)가 처음 정착했던 곳이자, 진성이씨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 ‘怡老’의 뜻 -> 대종회 게시 자료 참고해 작성 (검색되는 내용 중에는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긴다 / 벼슬에서 물러난 후 만년을 즐긴다는 의미도 보임)
- 이돈은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다. 광해군 2년(1611) 정인홍을 논척하다가 좌천되자 사직 후 귀향하였고, 1623년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해 이듬해에 죽었다. (고전종합 DB 제공 문집 해제 內 행력 참조)
- 대청 배면에는 나무판으로 된 널문을 달고, 위쪽에 철로 만든 원산(遠山)이 박혀 있는데, 이러한 창호 양식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에서 주로 나타난다. => 원산 : 문이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턱 대신 설치하는 부재. / https://blog.naver.com/ggcp2018/221655106661 참조.
- 현판을 쓴 이강호(李康鎬, 1863~1946 / 1851~1921)는 진성이씨 가문의 후손이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안동 이로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42 -> 안동 이로당(安東 怡老堂)은 호봉(壺峰) 이돈(李燉, 1568~1624)이 학문과 마을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한 정사이다. 이돈은 자는 광중(光仲)이고, 호는 호봉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601년(선조 34) 명경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예조정랑 등을 거쳤다. 1612년(광해군 4) 영해부사를 그만두고 돌아와 산수정(山水亭)과 이로당을 짓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1624년 영천군수로 재임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일자형 집이다. 가운데에 1칸 대청을 놓고 그 좌우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좌측 온돌방 뒷벽에는 벽장을 설치했다. 좌측 온돌방을 제외한 나머지 정면 3칸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대청의 앞쪽은 트여 있고, 뒤쪽은 판 머름 위에 두 짝 울거미 널문을 달았다. 널문의 위틀에는 철원산이 박혀 있는데, 이 창호 건물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에서 주로 볼 수 있다. 건물 구조 양식은 자연석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화강암과 막돌을 혼용하여 놓고 가운데 기둥 하나만 원주를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 마애촌 이야기, 진성이씨 대종회 – 사진자료실 http://www.jinseong.org/ -> 이 정자는 진성이씨 마애파 소유의 정자이다. 풍산읍의 동남쪽에 있는 마애의 동북쪽 언덕 위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 마애는 진성이씨가 진보에서 안동에 터를 잡을 때 입향조인 이자수(李子脩)가 맨 처음 정착했던 곳으로 나중에 두루로 옮겨 갔다가 증손인 흥양(興陽)이 다시 돌아온 이래 약 500여 년을 세거해 오고 있는 곳이다. 흥양의 6대손인 돈(燉)과 그의 아들 회보(回寶)대에 연이어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진사 14인을 배출하는 등 집성촌으로 문한을 이어온 곳이다. 현판은 해서체로 이강호(李康鎬)가 썼다. 노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의미로 경로의 뜻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