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이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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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로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돈(李燉, 1568-1624)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문의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해군 4년(1612)에 처음 세웠다. 건물의 이름 ‘이로(怡老)’는 ‘노인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이돈은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고, 광해군 2년(1611)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당하자 사직한 후 귀향해 이로당과 산수정을 짓고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이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했으나,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건물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왼쪽 온돌방 뒷벽에는 벽장을 설치했고, 오른쪽 온돌방 앞의 툇마루가 대청과 연결된다.

건물이 자리한 마애리는 진성이씨 중 안동에 처음 들어 온 이자수(李子修)가 처음 정착했던 곳이자, 진성이씨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 ‘怡老’의 뜻 -> 대종회 게시 자료 참고해 작성 (검색되는 내용 중에는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긴다 / 벼슬에서 물러난 후 만년을 즐긴다는 의미도 보임)
  • 이돈은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했다. 광해군 2년(1611) 정인홍을 논척하다가 좌천되자 사직 후 귀향하였고, 1623년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로 부임해 이듬해에 죽었다. (고전종합 DB 제공 문집 해제 內 행력 참조)
  • 대청 배면에는 나무판으로 된 널문을 달고, 위쪽에 철로 만든 원산(遠山)이 박혀 있는데, 이러한 창호 양식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에서 주로 나타난다. => 원산 : 문이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턱 대신 설치하는 부재. / https://blog.naver.com/ggcp2018/221655106661 참조.
  • 현판을 쓴 이강호(李康鎬, 1863~1946 / 1851~1921)는 진성이씨 가문의 후손이다.

1차 수정

이로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돈(李燉, 1568~1624)이 가문의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광해군 4년(1612)에 지었다. ‘이로(怡老)’는 ‘벼슬에서 물러나 인생의 늘그막을 즐긴다’는 뜻이다.

이로당이 위치한 마애리는 고려 말의 문신인 이자수(李子修)가 정착한 뒤 진성이씨 후손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이돈은 마애리 출신으로 선조 34년(1601) 과거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광해군 2년(1611)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되자,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이로당과 산수정(경상북도 민속문화재)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로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왼쪽 온돌방을 제외한 나머지 앞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 뒷면에 널문을 달았는데, 널문의 위쪽 틀에는 문짝이 안쪽으로 열리지 않도록 고정하기 위해 철로 만든 원산(遠山)을 박았다. 창호의 부재를 철로 만드는 것은 오래된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로당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