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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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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암정
낙암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낙암정
한자 洛巖亭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풍산단호로 895 (단호리)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4호
지정(등록)일 1987년 12월 29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낙암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문종(文宗) 1년(1451)에 흥해배씨(興海裵氏)인 낙암(洛巖) 배환(裵桓)이 처음 지은 것이다. 순조(純祖) 13년(1813)에 고쳐지었고, 그 후 고종(高宗) 18년(1881)과 1955년에 수리하였다. 배환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1351~1413)의 아들로 태종(太宗) 1년(1401)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거쳐 황해도․전라도․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판진주목사(判晉州牧使)가 된 후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건물은 낙동강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낙연 언덕 위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막돌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좌측 온돌방 쪽에는 모난기둥을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각형식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정자양식으로 그 원형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대청상부의 교묘하게 구성된 천장과 양측에 출입하기 위한 쪽마루가 특이하고 누 아래의 기둥이 짧은 것이 특징인데 이는 의도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낙암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배환(裵桓, 1379~?)이 조선 문종(文宗) 1년(1451)에 처음 지었다.

배환은 흥해배씨 중 안동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배상지(裵尙志, 1351~1413)의 둘째 아들로, 태종 1년(1401)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배환이 지은 건물은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고,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55년에 고쳐 지어진 것이다.

건물은 왼쪽에 온돌방을, 오른쪽에 마루를 배치했으며, 방과 마루 아래에는 서로 모양이 다른 기둥을 세웠다. 건물 전면은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달아 누마루처럼 꾸몄고, 좌우에는 출입을 위한 쪽마루를 덧달았다.

정자는 계평들판과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배환이 죽은 줄 알고 그를 묻어주려던 도깨비들이 정자 터로 좋다며 쉬어 간 자리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죽은 줄 알았던 배환이 벌떡 일어나자 깜짝 놀란 도깨비들이 도망았는데, 그 소동에 절벽 위에서 큰 바위가 떨어져 터를 닦았기 때문에 ‘바위가 떨어졌다’는 뜻의 정자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대청상부의 교묘하게 구성된 천장과 양측에 출입하기 위한 쪽마루가 특이하고 누 아래의 기둥이 짧은 것이 특징인데(기존 설명) -> ‘특이’하다고 설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음...(일반적인 정자와 어떤 부분이 차이가 있는지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빼는 것이 오히려 나을 듯)
  • 건물 오른쪽 쪽마루에 세워져 있는 나무판자의 기능 확인 필요
  • 건물의 기단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는데, 후대에 보수된 것으로 보인다. (1955년 보수때 이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음)
  • 배상지는 손홍량의 외손자로, 혼란한 시국을 피해 외가가 있는 안동 금계촌(현 서후면 금계리 일대)에 들어와 정착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 2020년 4월에 일대에 큰 산불이 발생해 낙암정 뒤편도 모두 불에 탔는데, 여러 사람의 노력 덕분에 이 정자는 훼손되지 않았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낙암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69 -> 낙암정은 1451년(문종 1) 배환이 처음 건립하였다. 낙암정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7세손 성균진사 배득인(裵得仁, 1566~1623)이 선조의 뜻을 이어 초정(草亭)을 세웠으나 역시 허물어졌다. 지금의 낙암정은 1813년(순조 13)에 중건한 것이며, 1881년(고종 18)과 1955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 낙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반 누각식 정자로 정면은 시멘트 기단을 45㎝ 높이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주초(柱礎)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기단은 원래 자연석이었으나 나중에 시멘트를 바른 것으로 보인다. / 온돌방은 1.5칸이고 마루가 4.5칸이다. 온돌방은 마루보다 바닥이 27㎝가량 낮다. 방에는 정면에 쌍띠살문이 있고 우측에도 띠살문이 2개 있으며 좌측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상부는 오량가(五樑架)로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마루에는 측면과 후면에 쌍판문(雙板門)이 4개 있고 머름중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벽은 판벽(板壁)이다.
  • [수필]톳재비가 터잡은 배감사 정자, 학산거사 안동문화 사랑,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hakga/1213 -> ‘톳재비’는 순수 안동말이며, 표준어는 도깨비다. / 배상지의 둘째 아들 배환은 태종 1년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내 사람들이 ‘배감사’라고 불렀다. 배감사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나루터 개평마을에 자리 잡고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은모래밭이 있는 강 맞은편에는 건시산 자락에 있는 상락대가 있었다. 어느날 배감사가 술자리를 마치고 상락대의 노을을 감상하다가 잠에 빠졌다. 해가 진 후 도깨비 무리가 나타나더니 배감사가 죽은 줄 알고 그의 몸을 둘러멘 채 강을 건너 건지비알이라는 가파른 절벽을 기어 올랐다. 절벽 가운데쯤 좁지만 판판한 곳에 이르렀을 때 모두 쉬어가기로 하고 배감사의 몸을 내려놓았다. 배감사는 그때 정신이 들었지만 무서워 눈을 뜨지 못했는데, 그때 도깨비들이 이곳은 정자 자리이지 무덤 자리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배감사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벌떡 일어나 크게 호통을 치자,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 달아나버렸다고 한다. 배감사의 목청이 너무 커서 산 위에 있던 큰 바위 하나가 굴러 떨어져 지금의 정자 자리를 한번 찍은 후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졌고, 날이 밝은 후 산길을 더듬어 돌아온 배감사는 이곳에 제비집같은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 도깨비가 정해준 정자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지역의 설화,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traditional-stories/story/6649 -> 옛날 풍산 고을 개평리에 글 읽기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마음씨 좋은 배환裵桓이라는 감사 한 분이 살았다. 배감사는 여러 선비들과 술을 마시고 놀다가 술에 취해 백사장에서 잠들어버렸다. 산책을 나온 도깨비들이 배감사를 보고 죽은줄 알고 묘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한 도깨비가 이 곳은 묘자리보단 정자지리로 좋다고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배감사는 도깨비들이 한 눈 판 사이에 도망을 갔다. 그리고 도깨비가 말한 자리에 정지를 세웠다고 한다. 도깨비들에게 좋은 정자터를 얻은 배감사는 여기에 정자를 짓고 풍월을 읊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 그러는 소동에 절벽 위에서 집채 같은 커다란 바위가 굴러 떨어져 정자를 짓기에 알맞은 터를 닦아 놓았다. 지금도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굽이치는 낙동강가 꺾다지른 듯한 단애 아래 낙항정이 자리하고 있다. 바위가 떨어진 자리에 지은 정자라 하여 ‘낙암정落巖亭’이라 부른다고 한다.
  • (참고) 계평들판과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보이는 낙암정, 안동 노닐기,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aftf/222096409285 -> 산불 피해 지역 항공사진 확인 가능
  • (참고) 화마에 갇혀서도 문화재 지켜낸 안동시설관리공단 직원 3인방, 영남일보, 2020.4.27.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0427010004196 -> 2020년 화재 당시 낙암정 피해 막은 사람들 인터뷰
  • (참고) 배상지,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407 -> 백죽당은 1351년(충정왕 3) 현재의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고려 말 성리학의 중심에 있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목은집(牧隱集)』 중의 시 「유증선생형직학공(有贈先生兄直學公)」에 배상지의 학문 연원이 잘 나타나 있음). 음사(蔭仕)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될 즈음인 어느 날, 중서랑(中書郞)이 고사를 이용하여 뜰에서 배상지의 무릎을 꿇리고자 하니 배상지는 즉시 관모(冠帽)를 벗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국이 혼란하여 머지않아 변혁이 있을 것을 깨닫고 사직한 뒤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에 머물던 외조부 손홍량을 생각하며 안동 금계촌(金溪村,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으로 옮겨가 집을 짓고 살았다. 그 뒤 고려의 운이 다하게 되자 배상지는 집 주위에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꿋꿋한 절개를 보여주는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그 집을 백죽당(栢竹堂)이라고 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여러 차례 출사의 명이 내려졌으나 자신의 뜻을 그대로 지켜 나갔다. 은거 중 금오산(金烏山)에 숨어 살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교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