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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량장군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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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량장군 정려
대표명칭 신여량장군 정려
한자 申汝樑將軍 旌閭
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동안길 64-2(마륜리 815-1 외)
지정(등록) 종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11호
지정(등록)일 1987년 6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신여량장군 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여량(申汝樑, 1564~1606)은 고흥 출신으로 1753년(영조 29) 정려를 받았다. 신여량은 임진왜란 시기 전라도 순찰사 권율의 휘하에서 행주대첩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시기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전에 참전한 장수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신여량은 1601년 통제영의 우후로 활동하던 중 1604년 일본의 무역선을 상대로 벌어진 당포해전에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1605년 신여량은 행첨사(行僉使)로 선무원종공신일등에 녹훈되었다. 당시 부산첨사로 재임할 때이다. 같은 해 12월 전라우수사로 임명받아 1606년 1월까지 전라우수영에서 재임하였다.

신여량의 사후에 신여량의 5세손 신숙(申淑)의 진정으로 1753년 신여량에게 병조판서의 증직(贈職)이 내려지면서 충신으로 명정(命旌)되었다. 정면·측면 각각 1칸의 정려각 안에는 충신정려 현판 외 2매의 현판이 걸려 있다. 1824년(순조 26)에 쓴 정려기(旌閭記), 1955년 최병심이 찬한 정려기가 현재 정려각 내부에 걸려 있다.

신여량이 남긴 유품으로는 보물 제1937호 「상가교서(賞加敎書)」, 보물 제1938호 「밀부유서(密符諭書」, 「주사선연지도」, 「당포전양승첩지도」가 있으며,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문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commemorative plaques or steles were bestowed by the government to honor a person’s patriotic loyalty, filial devotion, or matrimonial devotion and were meant to be hung on red gates or in pavilions in front of the honored family’s home.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무신 신여량(1564-1606)의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신여량은 고흥 출신으로 임진왜란 시기 전라도 순찰사 권율(1537-1599)의 휘하에서 행주대첩에 참전하였으며, 정유재란 시기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과 함께 해전에 참전하였다. 1604년에는 일본의 무역선을 상대로 벌어진 당포해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 공을 인정받아 1605년 공신이 되었으며, 같은 해 전라우수사로 임명받았다. 1753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충심을 기리는 증려가 내려졌다.

신여량과 관련된 유물로는 선조(재위 1567-1608)가 벼슬을 내리면서 발급한 「상가교서(보물, 1604)」, 「밀부유서(보물, 1605)」와 1603년 무과에 합격한 수군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장면을 그린 「주사선연지도」, 1604년 당포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그려진 「당포전양승첩지도」가 있다. 이 유물들은 모두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려각은 1753년에 지어졌고 그뒤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정려각 안에는 정려 현판 외에도 1824년과 1955년에 쓴 정려기 등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