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광양 옥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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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광양 옥룡사는 우리나라 불교와 민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이 35년(864~898) 머물다가 입적한 유서 깊은 곳이다. 옥룡사는 8세기 초 통일신라 때에 창건됐다고 전하는데, 1878년 화재로 불탔다. 절 동편 비석거리에는 도선국사와 통진대사 부도와 비석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 파손되었다고 한다. 1997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건물 터와 비석 조각을 찾아냈고,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과 관을 발견했다. 이는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도선국사는 옥룡자 주변의 땅 기운을 복돋우기 위해 동백나무 숲을 조성하였고, 차밭을 일구어서 보급한 것으로 전해온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는 옥룡사의 옛 터이다.

옥룡사는 도선이 통일신라 경문왕 4년(864)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은 이후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사찰은 1878년의 화재로 인해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부도와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는 원래 사람들을 괴롭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큰 연못이었는데, 도선이 마지막까지 대항하던 백룡의 눈을 지팡이로 멀게 한 후 연못의 물이 끓어오르게 해 용들을 쫓아내고, 숯을 모아 터를 닦아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도선은 이름에 ‘백(白)’이 들어가는 사람은 절에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조선시대에 백룡(白龍)이라는 이름의 거사가 이름을 속이고 들어와서 살다가 절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994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1997년 첫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탑비전지 등의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승탑재들과 탑비의 파편,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첫 발굴조사 때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담긴 관이 발견되어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되었으며, 출토된 유물들을 토대로 이곳에 옥룡사 창건보다 앞서는 시기인 8세기 경에 이미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절터의 동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도선이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함께 조성했다고 전하는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489호]이 있다.

  • 1872년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 옥룡사지는 5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정비가 된 상태이다. 조사 결과 건물지 17동, 탑비전지 등의 건물지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찰의 운영시기는 문헌기록과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9세기경부터 조선 후기까지로 추정된다.
  • 옥룡사지는 옥룡면 추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온다.
  •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간행된 5차 발굴보고서가 있으나, 검색으로는 내용 확인이 불가능하여 사지현황보고서의 개요 내용으로 갈음함.

1차 수정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이 자리는 원래 용 아홉 마리가 사는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용들이 사람들을 괴롭히자, 도선이 용들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도선은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인해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승탑 부재, 탑비 파편,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절터의 동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도선이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조성했다고 전하는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489호)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옥룡사를 도선국사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발굴조사 결과 옥룡사의 상한은 적어도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 가운데 인화문토기와 사각편병 그리고 같은 시기의 기와 등이 입증하고 있으며, 아울러 864년에 선각국사 도선이 옥룡사에 처음 왔을 때 옥룡사를 古寺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부터 머물면서 크게 번창한 옥룡사의 옛터인데 발굴 결과로 드러난 토기류로 보아 창건연대는 8세기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 인골 출토 위치에 정보 추가.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인골이 담긴 석관이 부도전지에서 발견되었는데,’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 “이후 도선은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 “도선국사는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 인과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도록 수정 기술 요망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인해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이후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는데,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발견되었다.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2차 수정

옥룡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864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옥룡사의 옛터다.

이 자리는 원래 용 아홉 마리가 사는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용들이 사람들을 괴롭히자, 도선국사가 용들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도선국사는 이곳에서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입적하였다. 옥룡사는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폐사되었으며, 절의 동편에 모여 있던 승탑과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옥룡사지는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건물지 17동과 석축 4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승탑 부재, 탑비 파편,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발굴조사 도중 인골이 담긴 석관이 부도전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인골은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고승들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절터의 동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도선이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조성했다고 전하는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489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