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인지재
경산 인지재 慶山 仁智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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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산 인지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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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慶山 仁智齋 |
지정(등록) 종목 |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유형문화유산) 제1호 |
해설문
국문
경산 인지재는 임진왜란 때 자인지역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한 최문병(1557~1599)이 강학소로 설립한 후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처음에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고 불렸으나 이후에 이름을 인지재로 바꾸었다. 최문병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18세기 초에 이곳으로 옮겨 서당으로 활용하였으나, 최문병을 추모하던 용계서원이 서원 철폐령으로 헐린 후 1986년에 복원되기 전까지 인지재에 최문병의 신주를 모셔 추모하였다.
최문병은 임진왜란 때 자인현의 선비로 의병을 일으켜 공적을 세운 의병장으로 자인현에 침입하려는 왜구를 사전에 차단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였고, 영천성 탈환에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이 1598년에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해산하였고, 1599년 여름에 병을 얻어 8월 4일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관련 유적으로는 용계서원과 최문병 의병장 묘역과 창의유적이 있으며, 최문병이 임진왜란 때 사용하던 말안장이 용계서원에 보관되어 오다가 현재 경산시립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인지재는 본당과 부속건물로 구성되며,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 건물이다. 온돌방 2칸과 대청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은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작은 건물임에도 문을 열면 방과 대청을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창호와 공간구성이 돋보인다. 조선 중기 지방 강학소의 건축 구성를 가진 소박한 건물이지만, 의병장 최문병이 수학하다가 임진왜란 때 자인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장소라는 점에서 경상북도 의병사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