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농암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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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각자는 앞면을 다듬은 네 개의 자연석 암벽에 ‘농암선생정대구장’이라고 두 글자씩 음각으로 새겨놓은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도로개설로 인하여 농암의 정자인 애일당(愛日堂)을 영지산 윗쪽으로 이전하면서 처음 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겨놓은 것이다. 원래 분천동 옛 애일당터에 있던 것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글자부분만을 잘라 옛 애일당 아래로 옮겼다가 2005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

'농암'은 원래 이현보(李賢輔)가 태어나고 자란 분천 강가의 큰바위 이름이었는데 훗날 이것으로 호를 삼았다. 그는 혼란했던 세상 속에서 이 바위처럼 귀먹은 듯 초연히 살기를 원했다. 농암은 45세 되던 해에 이 바위[농암] 위에 애일당을 지었다. 그리고는 75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농암이 있는 분천 강가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다가 이 곳 분천에서 삶을 마쳤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에 있는 4개의 바위는 이현보가 세운 애일당(愛日堂)의 원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글자를 새겼던 암벽을 잘라 옮겨 온 것이다.

애일당은 이현보가 나이 든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던 바위 옆 분강(汾江)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중종 7년(1512) 지었던 별당이다. 이현보는 이곳에서 구노회(九老會)를 결성해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예안에서 도산까지 도로를 개설하면서 당시 분천동(汾川洞)에 있었던 애일당(愛日堂)을 영지산 위로 옮기게 되었고, 애일당이 있던 자리 옆의 암벽에 ‘농암선생정대구장(壟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다.

이후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에 글자 부분만 잘라서 같은 해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로 옮겨진 애일당 아래로 옮겼고, 2005년 농암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왔다.

글자 하나의 크기는 대략 75㎝ 정도로 큰 편이다.

  • ‘농암'은 원래 이현보(李賢輔)가 태어나고 자란 분천 강가의 큰바위 이름이었는데 훗날 이것으로 호를 삼았다. 농암은 45세 되던 해에 이 바위[농암] 위에 애일당을 지었다.
  • 안동 지역의 음각 글씨로는 가장 크다. 그중 ‘농암(聾巖)’ 두 자를 새긴 바위는 길이 5m, 두께 2.5m, ‘정대(亭臺)’ 두 자를 새긴 바위는 길이 4m, 너비 2m, 두께 2m, ‘구장(舊庄)’ 두 자를 새긴 바위는 길이 4m, 너비 3m, 두께 3m의 크기이다.

1차 수정

농암 각자는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가 지은 별당의 원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바위에 새긴 글자이다.

이현보는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이현보의 집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분강 기슭에는 귀먹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현보는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중종 7년(1512) 이 바위 옆에 ‘애일당(愛日堂)’이라는 별당을 짓고,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9명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다.

일제강점기에 예안에서 도산까지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서 애일당은 영지산 위쪽으로 옮겨졌고, 이때 애일당의 원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글자를 새겼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농암선생정대구장(壟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여덟 글자이며, ‘농암 선생이 정자를 지었던 옛 자리’라는 뜻이다. 이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애일당은 1975년 도산면 분천리로 옮겨졌고, 농암 각자 역시 글자가 새겨진 부분만 바위에서 잘라내 함께 옮겼다. 애일당과 각자는 모두 2005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농암 각자는 안동 지역에 남아 있는 각자 중 가장 크며, 글자 하나의 크기는 대략 75㎝ 정도이다.